미(美)~여(女)~문(文)/Amenity, Feminism and Lifeway ㉓ / 칼럼니스트 박기철
그는 엄청난 욕을 먹기도 했던 분열된 영혼이었다. 하지만 그 분열된 영혼은 당대의 지배적 신념과 이념들을 해체하고 말았다. 계몽주의 시대에 계몽주의도 해체했다. 바로 대단한 반골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다.
소크라테스 시대 이후 이성과 진리, 합리, 논리로 일관된 서양철학사에서 루소라는 사상가가 나온 것은 거의 기적같은 일이다.
그런데 그런 기적을 실현시킨 프랑스 사회도 대단하다. 1770년대에 프랑스의 학문 사회가 논문 공모전에서 내건 질문은 “학문과 예술의 진보는 풍속의 순화에 기여하였는가?”였다. 그 시대에 그런 진보적 제목을 걸었다니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기여하였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쓰는 것이 공모전의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관한 루소의 답변은 완전히 정반대였으니 더 대단하다. 루소에 의하면, 학문과 예술의 진보를 통한 문명의 진보는 오히려 도덕의 퇴보를 가져와 인류 역사를 불행과 악덕으로 넘쳐나게 하는데 기여했을 뿐이라고 했다. 정답에서 일탈한 반골적인 답변으로 일관된 루소의 논문을 당선작으로 선정한 프랑스 학문 사회의 수용성은 더 대단하다.
루소는 어떻게 그런 반골적 사상을 전개할 수 있었을까? 무언가 지대한 영향을 끼친 누군가가 있지 않았을까? 스위스 제네바 출신의 방랑자였던 20대의 루소를 처음 품어 주었던 여인은 프랑스 안시에 살던 농염한 30대 바렝 부인(Franoise-Louise de Warens , 1699~1762)이다.
루소 생가였던 스위스 제네바의 루소박물관 안에서 가장 크게 걸린 사진은 바로 바렝 부인 초상화였다. 그녀가 그만큼 루소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는 뜻일까? 루소와 관련된 책 옆에 나란히 있는 바렝 부인 관련 책도 눈에 띈다.
내용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루소 책 옆에 나란히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만큼 바렝 부인은 루소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루소보다 열 세 살이나 많은 바렝 부인은 연상의 여인으로 루소를 품었다.
하지만 바람기 다분한 프랑스 여인이었던 바렝 부인은 루소의 속을 새카맣게 태우기도 했던 여인이다. 하지만 사랑의 아픔을 통해 성숙했을까? 루소는 심적 고통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더욱 탄탄히 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위대한 사상가가 태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