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연제구 연산동 지하철역. 서툴지만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가 역내 가득 울려 퍼진다. 개찰구 옆에 위치한 피아노 앞에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가 악보를 넘기며 건반을 두드리고 있다. 맞은편에는 한 아주머니가 악보를 보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조용한 지하철역에 피아노 연습실이라도 차린 걸까.
평일에는 거의 매일 연산역에 나와 피아노를 친다는 주부 김선남(50) 씨는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우다 그만 둔 후로는 한 번도 피아노를 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연산역사 구내를 지나다가 사람들이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집에 있는 오래된 악보를 들고 나와 연주하기 시작했다. 김 씨는 “잘 치진 못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수 있고, 잘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어서 뿌듯하다. 요즘 역에 나와서 피아노 치는 게 내 취미생활이다”라고 말했다.
출퇴근을 위해 매일 연산역을 지나는 직장인 강주호(32) 씨는 “예전에는 그냥 지나다니던 지하철역이었는데, 요즘엔 피아노 소리가 자주 들려서 지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고 전했다.
지하철역에 설치된 피아노는 예술로 행복해지는 세상을 꿈꾸는 비영리단체 ‘더하모니’의 첫 번째 프로젝트 ‘달려라 피아노’의 117번째 기증 피아노다. 달려라 피아노는 자주 연주되지 않아 거실이나 공공시설에 방치된 중고 피아노를 기증받아 아티스트의 손으로 새로 디자인한 뒤, 지역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프로젝트. 영국이나 뉴욕의 거리 피아노처럼 공원 등 휴식 공간에 설치해 누구나 마음껏 연주하고 즐기는 가운데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의 수단이 되도록 하려고 시작됐다고 한다.
개인 또는 기업으로부터 기증받은 피아노는 상태에 따라 A, B, C로 나뉘는데, 상태 A는 지역 아동센터, 복지시설에 교육 및 연주용으로 재기증되고, 상태 B는 거리,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피아노로 재탄생된다. 상태 C는 너무 오래돼 조율해도 음정을 맞추기 어려운 상태로 폐기해야하기 때문에 기증받지 않는다.
‘달려라 피아노’의 시작은 2008년 영국 버밍엄 거리에 설치된 ‘Play Me! I’m Yours’라는 타이틀이 붙은 피아노다. 설치 미술가 루크 제럼이 어느날 자신이 다니던 빨래방에서 어느 누구도 서로 말을 걸지 않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아이디어로 피아노를 떠올려 공공장소에 피아노를 설치한 것. 피아노가 생기자 사람들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Play Me! I’m Yours’라는 이름의 거리 피아노는 영국 50여 곳으로 확대돼 소통의 즐거움을 안겨주었고, 이는 뉴욕의 ‘Sing for Hope’ 재단을 통해 뉴욕으로도 전파됐다. 더하모니는 ‘Sing for Hope’ 재단을 통해 서울의 거리 피아노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것이 ‘달려라 피아노’의 시작이 되었다.
2013년부터 시작된 ‘달려라 피아노’는 현재 전국에 약 150여 곳의 복지시설, 공공장소 등에 중고 피아노가 재기증되어 사람들에게 소통의 수단이 되고 있다. ‘달려라 피아노’의 정석준 대표는 “피아노를 기증하는 것은 단순히 악기를 기증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즐거움을 선물하는 것"이라며 "경제적으로는 어렵지만 음악을 통해 어린이들이 예술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도록 시민과 기업이 참여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