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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범 칼럼]'자릿값'도 못해서 '쪽팔리는' 사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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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범 칼럼]'자릿값'도 못해서 '쪽팔리는' 사내들
  • CIVIC뉴스 칼럼니스트 차용범
  • 승인 2021.02.22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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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公人)은 사회적 책임이 많은 사람이다. 국가·사회에 영향을 주는 만큼, 그에 따른 덕목(德目)과 금도(襟度)도 많다. 곧 공인의식·공인윤리다. 공직자가 갖춰야 할 덕목, 사자성어를 보라. 명경지수(明鏡止水, 맑고 깨끗한 마음), 세수청백(世守淸白, 청렴하고 결백한 지조), 공명정대(公明正大, 마음이 공평하고 자기 욕심 없음)···. 두루 사심·탐욕과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인의 최대 덕목은 공정과 신뢰다. 막스 베버는 특히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강조한다(‘직업으로의 정치’). 겸손, 소통, 배려, 신의, 소신···, 같은 함의다. 이즘, 정치인의 덕목으로, 내로남불, 후안무치, 위선에, 진보논객 강준만은 ‘싸가지 없음’을 들기도 하나, 그것은 현실정치의 독선·오만을 비판하는 역설적 반어(反語)일 터고.

법의 지배’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법관의 덕목도 무겁다. 재판의 공정성·중립성을 담보할 사법부의 독립이며 성실한 법의 적용을 위해서다(요셉 라즈). 사법의 정치적 이용을 꾀하는 유혹을 극복할, 그 법관의 성품과 덕성은 법치주의의 성패를 좌우할 결정적 요소다. 잘 부패하지 않는 성품과 여론·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 같은 것들이다.

언론인도 그렇다. 권력 비판·감시의 사명, 공중에의 봉사에 대한 신념, 진실추구의 가치를 생각하면, 독특한 윤리·역량이 필요하다. 그 분야 조직·단체를 기준 삼는 특유의 행동방식도 그렇고. 언론윤리의 우산 아래 공유하는 원칙들은 명료하다. 그래서, 언론인도 ‘전문인(professional)’이라 하지 않나.

공인이 두루, 자기 덕목·금도에 충실하면 얼마나 좋겠나. 그러나, 그건 어리석은 기대다. 이즘 한국 사회에는 원로배우의 유행어처럼 ‘못난~놈’도, 영화 ‘친구’의 명대사처럼 ‘쪽팔리는' 사람도 널려 있다. ‘100세 원로’ 김형석은 말한다, “100년 살아보니 알겠더라, 절대 행복할 수 없는 두 부류”를. 권력·명예와 이기(利己)를 쫓다, 제 발로 타락·침몰하는 사람이다.


1. “법복을 입은 정치꾼, 지옥 문 앞에서 발가벗다”(중앙). 이즘 ‘법관탄핵 파문’에서 가장 큰 쪽팔림은 김명수의 몫이다. 대법원장이 사법부 독립을 포기하고 정치에 굴종하며, 국민과 국회를 상대로 ‘‘거짓말’을 거듭한다? 진실-거짓을 구분하여 정의·공정을 수호해야 할 사법부 수장의 절대악(惡)적 사심이다. 사법부 안팎의 ‘대법원장 사퇴’ 촉구가 들불 같다.

들춰보면, 김명수는 대법원장은커녕 법조인의 덕목부터가 맹탕인 사람이다. 대법원장이 삼권분립 원칙과 법관의 정치적 중립을 무너뜨리며 후배-국회-국민 앞에 거짓말을 했다? 이런 법관의 존재 자체가 한국 헌정사의 치욕이다. 오죽하면, 법원 일반직원이 “대통령 앞에 ‘꼬붕’처럼 화답한 사상최악의 대법원장”이라고 통분해 했을까.

김명수 대법원장은 최근 법관탄핵 파문에서, 사법부 독립을 포기하며 정치에 굴종하고, 국민·국회를 상대로 거짓말을 거듭하며, 한국사회와 사법부를 ‘쪽팔리게’ 하고 있다(사진; 구글 이미지).
김명수 대법원장은 최근 법관탄핵 파문에서, 사법부 독립을 포기하며 정치에 굴종하고, 국민·국회를 상대로 거짓말을 거듭하며, 한국사회와 사법부를 ‘쪽팔리게’ 하고 있다(사진; 구글 이미지).

이제, 그의 자질과 정체는 드러났다. 그는 민주주의 수호와 사법부 독립을 이끌 품성·역량이 없는, ‘정권의 충실한 법비(法匪, 법을 악용하여 사적 이익을 취하는 무리.)’일 뿐이다(김순덕). 사법부 수장이 정치권에 굴종한 것 자체가 사법농단이다. 그처럼 권력에의 야합에 쉽게 썩는 성품, 남의 인격을 깔아뭉개는 덕성으로, 사법부를 지켜갈 순 없다.

‘툭 까놓고 말해서’, 그가 남긴 것은 이기적 처신에 진영 보호밖에 없지 않나. 오직 ‘내 편 심기’식의, 그 사악한 ‘코드 인사’ 역시 역사적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가 한국 사회와 사법부에 얼마나 ‘쪽팔리는 존재’인지는, 그도 모르진 않으리. 그가 계속 ‘법비’ 노릇을 하려들 때, 그는 ‘불알 값’도 못하는 ‘못난 놈’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터다.


2. 기자 출신 이낙연의 부적절한 ‘언론 까기’도 화제다. TV토론에서, ‘라떼는 말이야’식으로 언론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그는 언론을 두고 "굉장히 당파화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때는 당파적이지 않은 척하려고 노력했다. 이제는 오히려 당파적인 척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강성 여권 지지층의 언론 비판 내지 공론 훼손에 대한 생각이다.

그는 국무총리 시절에도 설익은 언론 까기로 주제넘은 훈계라는 비판을 산 적이 있다. KBS 기자가 대담을 진행하며 대통령에게 무례를 범했다는 주장으로, 친문 네티즌들의 집중포화를 받을 때다. 그는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신문의 ‘문’자는 ‘들을 문(聞)’자다. 많은 기자는 ‘물을 문(問)’으로 잘못 안다. 동사로서의 ‘신문’은 새롭게 듣는 일이다···”

이낙연 대표는 부적절한 ‘언론까기’를 거듭하며 언론에의 천박한 인식과 주제넘은 오만으로 언론계를 ‘쪽팔리게’ 하고 있다(사진; 상-KBS 화면 캡처, 하-페이스북 캡처).
이낙연 대표는 부적절한 ‘언론까기’를 거듭하며 언론에의 천박한 인식과 주제넘은 오만으로 언론계를 ‘쪽팔리게’ 하고 있다(사진; 상-KBS 화면 캡처, 하-페이스북 캡처).

그는 <동아일보> 출신이다. 기자생활 21년에, ‘취재대상’ DJ와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5선 국회의원에, 국무총리, 여당 대표까지 간 정치인이다. 그는 모르는가, 회사 선배 이연교의 전설적 스토리를. 이연교는 사회부 기자 시절 불의의 교통사고로 청력과 평형감각을 상실하곤, 현업 복귀의 꿈을 안고 8년을 투병하다 결국 사직한 집념의 기자다.

그가 언론계와 결별하며 남긴 언론 역정, ‘네가 기자냐’다. 책 제목, 왜 ‘네가 기자냐’인가. 그는 국방부 출입 시절 장관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충격적 사건이 터졌을 때, 회견석상에서 “장관은 책임을 지고 물러날 용의가 있는가?”를 묻지 못했다는 이유로, 선배로부터 눈물이 나도록 격한 호통을 당한 일이 있다. “네가 기자냐?”고-.

그렇다, 기자는 ‘묻는 직업’이다. 대통령이든 누구든 ‘하는 말’만 잘 듣는 게 아닌, ‘들어야 할 말’을 꼭 들으려 묻는 직분이다. 이낙연은 ‘신문’을 (기자가)‘새롭게 듣는 일’로 풀지만, 실상 신문은 ‘독자가 새로운 견문을 듣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어려운 질문 던지는 게 언론의 역할”이라는 경구도 있지만, 그는 대통령 지지자 편에 서서, 직분에 철저했던 후배를 보고, ‘언론 까기’를 자청했다.

‘모든 판단을 정확한 사실에서 출발하려 하는 버릇’, ‘어떤 사안이든 균형 있게 보려 하는 습성’, 그 ‘신문기자 경험의 귀중한 선물’(2017. 한국신문협회 창립 축하연)은 ‘말’일 뿐인가. 두루, 언론에의 천박한 인식과 권력에의 약삭빠름, 주제넘은 오만으로 바쁜, ‘쪽팔리는’ 언론계 선배다.


3. <한겨레> 현장기자의 “정권 편향적 법조기사 작성" 집단성명과, 그 성명의 드넓은 파장 역시 한국사회의 핫이슈다. 자사 법조보도가 편향적이라는 현장기자의 비판⇨사회부장의 보직사퇴⇨편집국장 사과⇨회사차원 사과에 이어, 그 성명에 반박하는 ‘익명’ 구성원의 글(”젊은 기자들의 성찰을 바랍니다“)까지다.

이 ‘익명’의 글은 조직 내 소통 부재, 언론의 진영논리 같은 언론윤리 차원의 논의를 넘어, 기자사회의 금도를 외면한 것 같다. 무엇보다 저널리즘의 핵심가치, 그 ‘진실추구’와 검증의 규율을 논할 맥락은 제쳐두고, “<한겨레>의 진보성향에 공정한 잣대를 들이대고 싶다면 중도 성향 매체로 옮기기를 권한다“는 문맥에선, 차마 가슴이 먹먹하다. 어쩌다 선-후배 관계가 이 정도까지 갔나.

이번 사태의 구조는 단순·명쾌하다. 현장기자들은 편집국 국·부장단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성역' 없는 비판의 칼날을 세웠던 한겨레가 조국 사태 이후 '권력'을 검증·비판하는 데 점점 무뎌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기자들의 주장은 무리가 없었던 듯하다. 사회부장·법조팀장이 보직사퇴하고, 편집국장이 사과 입장을 밝혔다. 회사 역시 사과문을 게재했고-.

<한겨레>는 최근 현장기자들의 “정권 편향적 법조기사 작성" 집단성명과 관련, ”문제의 보도가 정확한 진실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사과문을 게재했다.

<한겨레>가 진실성·정확성을 결여한 보도를 솔직하게 사과한 부분은 신선했다. 세계 권위지도 보도과정에서 진실성·정확성을 추구하지 못한 결과, ‘사과’를 하곤 했다. 언론의 신뢰를 회복할 노력, 그 사과의 결과는 참 좋았다. WP의 ‘지미의 세계’나, NYT의 ‘제이슨 블레어 사건’이 그러했듯.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온 ‘익명’ 구성원의 성명 비판 글은 회사 사과의 취지며 다양한 후속 논의를 무색케 한다. 현장기자들은 정부·여당 주류와 가까운 86세대 데스크들의 편향성, 보수진영에는 엄격하고 진보정권에는 무딘 비판 잣대 같은 ‘불공정’을 걱정하는데도, 이 글은 이념문제를 내세워 ‘젊은 기자’를 윽박지른 것이다.

정녕, 이번 성명은 왜 나왔나? 내부 소통문제와 함께, 일부의 진영논리 함몰 때문 아닌가. 권력을 비판해야 할 대상으로, 또는 (다른 권력에 맞선)‘우리 편’으로 보는 그 차이다. 신문 보도가 문재인 정권의 법무부에 유독 관대했다, 데스크가 구체적 정황·물증 없이 ‘한쪽 편드는 기사’를 요구한다···, 기자들의 그런 주장 아닌가?(미디어오늘).

<한겨레>의 기자 성명은 ‘조국 사태’ 이후 두 번째다. <한겨레>가 향후 놓치지 않아야 할 가치 역시 뚜렷하다. “특정 정당·정치세력을 지지·반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창간사 문맥이다. 이건 한 신문을 넘어, 모든 언론이 추구해야 할 ‘공정성’의 가치다. 선배가 후배에게 강조할 가치, 더 어떤 게 있나?


4. 이쯤에서 저널리즘’이 추구해야 할 원칙을 되새긴다. 한국 기자사회가 기존의 언론윤리강령에, 새로 제정한 언론윤리헌장의 핵심원칙도 같다. 헌장은 서문에서, 언론의 존재이유를 확인했다. 언론은 시민을 위해 존재하며, 시민의 신뢰는 언론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는 것이다.

헌장 본문 9개 항은 ‘윤리적 언론’으로 출발한다. (진실 추구)윤리적 언론은 진실을 보도한다. (공정 보도)윤리적 언론은 특정 집단·세력·견해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무사한 자세로 보도한다, (갈등 해결)윤리적 언론은(···)진영논리에 빠져 특정세력을 편들거나 반대세력을 공격하지 않으며(···) 같은 문맥이다.

‘영원한 언론인’ 월터 리프만은 설파했다. “뉴스란 사회적 모든 상황의 반영 아닌 눈에 띄는 측면에 대한 보고”라고-. 언론은 특정한 독자·시청자를 위해 시각·지침을 바꿀 순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 저널리즘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통적 과제, 정확성·공정성이다. 특히 언론이 공정성을 의심받는 순간, ’언론‘은 이미 ’언론‘일 수 없다.

언론은 그 ‘공정’을 어떻게 견지하는가? 특유의 이념·지침을 갖더라도, 사회구조에 대한 입장·태도는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이른바 ‘정당한 정파성’이다. (이낙연은 언론의 정파성을 비판하지만, 미국 대선 속 주요언론의 바이든 지지 선언을 보듯)대중매체의 ‘정파성’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단, 어떤 입장을 취하려면 특정 정당(진영)을 항상 지지하기보다는, 그 추구하는 이념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언론이 정파적 경향에 빠져 그 일관성을 외면할 때, 그건 ‘정당하지 못한 정파성’에 해당한다. 저널리즘의 진실추구 원칙을 거스르며 불공정의 늪에 침몰하는 것이다. 한국 언론이 절감하고 있는 ‘공정’에의 위기는 바로 이 부분이다.

그 ‘익명’이 말한 ‘진보적 가치’는 뭔가? 공정-정의-평등이며, 사회적 약자 보호···, 이런 부분 아닌가? 그건 ‘젊은 기자’들이 추구하는 공정보도에의 요구, 신문이 추구하는 ‘진보적 가치’와 다른가? <한겨레>의 ‘진보적 가치’가 권력의 일탈을 감싸며, 선택적 정의를 두둔하는 것은 정녕 아닐 터다.


“나는 내 할 일을 다하고 있는가”-‘부산 언론계 거인’ 권오현 대선배의 경구다. 그는 사옥 중앙통로에 대형현판을 붙여두고, 사원들이 두루 그 뜻을 새기도록 했다. 모든 사원에게, 스스로 책무에 걸맞은 ‘밥값’이여, ‘이름값’이며, ‘자릿값’을 다하는지 준엄하게 되물었다.

소싯적 어른들로부터 받은 경구가 생각난다. “불알 떼서 개 주라”-머슴애들이 이런 말을 듣는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다. ‘떳떳하지 못 한 졸장부’라는 극한의 질책이었던 것이다. 굳이 졸장부만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 그런 떳떳하지 못한 공인은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 공인들도, ‘이름값’, ‘자릿값’을 단단히 한다면 얼마나 좋겠나.

명색이 대법원장이며 ‘언론계 선배’라는 사람들이, 정치적 이해며 진영논리에 빠져, 후배들의 인격을 깔아뭉개며, 주제넘게 윽박지르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자릿값' 좀 하며, ‘쪽팔리는’ 짓 좀 하지 않았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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