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壬寅)년 한 해가 저물어간다. 우리 현대사의 어느 해인들 놀람과 고통, 환희와 슬픔이 없었던 해가 있었으랴만, 올 역시 행운과 불행, 희망과 걱정이 격렬하게 교차한 한 해였다. 언론들이 한 해 결산에 바쁘듯, 글쓴이 역시 굳이 기억하고 싶은 몇몇 상황과 맥락을 되새긴다. 당대의 현실을 냉정하게 평가하며, 내일을 위한 각성과 노력을 다짐하고 싶은 것이다. 역사는 그런 진중한 작업 끝에 필연적으로 발전할 것이므로-.
한국 사회가 기억해야 할 바는 복잡다단하다. 여러 상황과 맥락은 겉으로의 현상과 함께, 속으로의 과제를 안고 있다. 올해, 국민 여망에 힘입은 정권교체를 이루었으나, 국민 분열에 이은 정치권의 혼란은 ‘내전적 상황’을 말할 만큼 심각하다. 한국 언론은 ‘저널리즘’의 상실을 넘어 경계 없는 타락을 일삼으며 언론의 존재가치와 국민의 신뢰를 잃고 있다. 한국 사회의 후진적 안전사고, 그 ‘이태원 참사’도 스쳐 지날 수 없다. 우리는 벌써 원인과 대책을 찾기보단 정파적 이익을 도모하기에 바쁘니.
그 기억해야 할 역사적 상황에는 공통적 맥락이 있다.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명운을 건 구조적 위기 속에서, 오직 ‘나(우리)만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오만과 착각이 그것이다. 새 정부 출범 초기부터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정피적 망동, 언론의 경계 없는 탈선을 ‘언론의 자유’로 호도하고, 이태원 참사를 국민분열의 고리로 악용하는 맹목적 도발‥, 그건 ‘우리 생각’으로 ‘국민의 뜻’을 넘어설 수 있다는 불온한 오만과 위험한 착각에 터 잡고 있다.
대한민국, 이대로 갈 순 없다. 지난 세월 산업화 30년-민주화 30년의 열정과 한신으로 오늘 세계 속에 당당하지만, 지금 같은 국민 분열과 정치적 대치라면, 내일의 한국은 그저 두렵다. 세계 곳곳에서 갈등과 대립은 일상적이지만, 한국처럼 주말마다, 서울 도심에서, 강경좌파와 강경우파가 온몸으로 부딪히는 나라야 또 있겠나. 그 국민의 분열과 정치의 무능으로는 한국은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깨우쳐야 할 만만칞은 현실과 역사적 맥락은, 그래서 두렵기만 하다.
1. 올 정권교체 이후, 여-야의 정치적 대치는 날로 날카롭다. 그 정권교체는 민주주의의 형식적 성공을 대변할 뿐, 그 속의 진영논리며 갈등․대치는 한 치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오늘도 한국 정치엔 건전한 비판을 넘는 악의적․노골적 비난과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오만과 독설이 넘실댄다. 정권을 견제하고 날 세워 비판하는 것은 야당의 몫, 거기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불행히도 이즘 야당의 행태는 합리와 상식의 경계선을 넘어, ‘대선 불복’을 연상할 정도다.
국회 권력은 정부 권력과 정면 대립하며 국정의 발목을 걸기에 바쁘다. ‘행정부 정책 주도’-‘국회 국정견제’의 국가체제 속에서, 그 국회 권력은 입법권을 함부로 남용하며 정부 권력인 양 행세하고 있다. 정부의 예산편성권을 외면하며 ‘야당 맘대로’ 예산을 고집, 정부의 국책사업과 개혁정책을 가로막을 정도다. 국회가 정책 집행기관인가? 야당의 절제 상실, 국민 선택을 외면하는 무도한 해악이다. 오죽하면 “민주당은 국적 없고 당적 뿐”이라는 야당 의원의 직격이 나오겠나.
야당은 일찍부터 논리적·합리적·비판보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혐오정치에 탐닉했다. 대통령의 미국 순방 중 ‘비속어 사용’ 논란을 대하는 야당의 태도를 보라. 김의겸의 ‘청담동 술자리 의혹’ 같은 저질 음모론에 야당 지도부가 앞다퉈 가세하고, 장경태의 ‘빈곤 포르노’, ‘조명 촬영’ 의혹과, 김종대의 ‘대통령 관저 천공 개입’ 논란 역시 사실 확인 없이 공유한다. 온갖 거짓 선동이 쉽게 통하는 야당의 정신세계, 참 딱하다.
‘한국 정치는 죽었다’-국가는 복합위기에 처했어도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을 꾀해야 할 정치 기능은 사라졌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여야가 협치는커녕 사사건건 충돌하는 상황, 정부·여당의 책임도 만만찮다. 그저 집권에 성공했을 뿐, 야당과의 소통․화합보다 비타협적 강경노선부터, 여당의 내부 안정보다 후진적 계파정치부터 찾고 있다. 국가적 위기며 구조적 국민분열 앞에 해결책 하나 찾지 못하는 정치, 민생 대신 극한대결에 침몰한 정치권, 그저 처연하다.
2. 한국 언론의 오만과 착각 역시 날로 깊다. 일부 전통 언론의 정파성과 정확․공정의 틀을 외면한 취재·보도 행태는 이미 ‘저널리즘’을 상실했다. 몇몇 유사 언론은 무책임한 선전․선동을 일삼으며 사회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공영방송 MBC의 잇따른 조작보도 논란과 취재기자의 일탈행위는 언론윤리를 묵살한 타락이다. 일부 유튜브 매체의 ‘청담동 술자리 의혹’ 제기 역시 사실 없는 선동이며, 한동훈 법무장관 관용차 스토킹과 주거지 침입 취재는 취재의 자유 영역을 벗어난 범죄적 타락이다.
이처럼 이즘 일련의 의혹 보도에는 ‘사실’이 없다. 탐사보도에 기댄 폭로 저널리즘을 말하지만, 현실비판적 관점과 구체적 증거-체계적 자료-객관적 묘사가 없다. 그저 가십거리일 수도 없는 무책임한 폭로로 세상을 어지럽히며 정파적 이익과 ‘돈벌이’ 추구에 바쁜 것이다. ‘사실’이 없는 ‘가짜뉴스’에 야당이 협업·가세하는 것은 당파적 진영논쟁을 넘어, 언론 영역에서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사회적 해악일 뿐이다(김정기).
새삼 강조할 바, 저널리즘의 첫째 의무는 진실 추구다. 저널리즘의 본질은 검증의 규율에 있고, 언론인이 추구해야 할 정확성․공정성, 그건 언론윤리의 핵심가치다. 존재하지 않은 것을 덧붙이지 말라, 독자․시청자를 속이지 말라, 방법과 동기에 관해 가능한 한 투명하라…. 그 언론의 우뚝한 신조는 “절대로 조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즘 MBC의 잇단 보도는 그 명쾌한 핵심원칙을 포기했다. 몇몇 유튜브 매체의 타락 행태는 정통 언론과 사이비 언론의 경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 타락한 언론이 한둘이겠나. ‘노골적 방송 사유화, 음모 장사꾼 김어준의 퇴장’-한 신문 사설은 우리 사회가 공유해야 할 합리적 성찰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언론이 타락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불법의 경계를 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 정파적 보도 또는 선전·선동으로 광우병 파동과 촛불 사태 같은 사회혼란을 부추길 수 있다는 오만과 착각 때문이다. 한 매체의 이태원 사태 희생자 명단 (유족 동의 없는)공개 강행에 국민 6.8%만 공감한 사실을 보라. 거기에 그런 오만․착각에 기댄 선전·선동으로 돈과 권력까지 쥘 수 있으니….
한국 언론이 깨우쳐야 할 바는 뚜렷하다. 언론이 존재이유와 언론윤리를 외면할 때, 그건 언론의 사멸을 넘어 심각한 사회적 해악으로 전락한다. 언론은 저널리즘의 기본원칙과 검증의 규율, 언론법제-언론윤리를 새삼 깨우쳐야 한다. 언론은 이제 저널리즘의 경계 안으로 복귀해야 한다. 사이비 언론은 ‘가짜뉴스’로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사회파괴 행위를 멈추어야 한다. “혐오·거짓에 돈·권력 주는 SNS, 민주주의 위기 낳았다”-202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마리아 레사(언론인)의 최근 경고는 곧 한국 사회에 주는 경고다.
3. ‘이태원 참사’는 한국이 여전히 ‘후진국형 위험사회’에 머물고 있음을 증언한다. 8년 전의 세월호 참사가 그저 물욕에 눈이 어두워 지켜야 할 안전규정을 묵살한 끝에 빚은 후진적 안전사고라면, 이태원 참사 역시 생명경시‥안전불감 속에서 위험의 전조를 외면한 끝에 빚은 무능형 안전사고다. 지진·태풍 또는 폭발·붕괴 같은 어떤 인간외적 요인 없이, 오직 군중밀집·직무방기·대응실패를 비롯한 인간적 요인들로 발생했기 때문이다(박명림).
한국 사회는 20C 말부터 후진적 사고를 막을 국가적 대응에 나섰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미국 유력지 워싱턴포스트(WP)가 ‘이태원 참사, 1995년 삼풍 붕괴의 유령을 소환하다' 기사에서 "한국은 삼풍 이후 30년간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는가”를 물은 대로다. 초점은 분명하다. 그 후진적 위험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이해하고 개선해야 할 것인가? 그 후진적 사고가 터질 때마다 대책을 반복하는 악순환을 뛰어넘어,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을 시대적 소명으로 삼아야 한다.
먼저, 참사의 책임부터 엄히 따져가야 한다. 국가적 책임-사회적 책임-개인적 책임을 함께 살펴 가야 할 터다. 참사 당시 책임․직무에 따른 국가 차원의·법적․정치적·책임을 함께 물어가야 한다. 그와 함께 새겨야 할 시민의 책임 역시 외면할 수 없다. 너와 나의 각성·체화 없이 후진적 위험사회를 극복하기는 어려울 터이기 때문이다. '안전사회 한국', 시민의 몫은 적지 않다. 이건 이념∙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비상식, 죽음∙삶의 문제 아닌가.
선진국은 국민안전 문제를 '인간 안보(human security)' 차원에서 다룬 지 오래다. 우리, 이제 국민안전을 사회발전의 중심에 놓을 것인가, 계속 '위험사회'의 그 길을 갈 것인가? 그 기로에서, 우리는 국가에 무엇을 요구하며, 스스로 무엇을 다짐할 것인가? 그 참사의 구조적 원인을 찾고 재발을 막을 대책을 논의하기에 앞서, 진영과 파당에 가댄 대치가 벌써 선명하다. 진영논리의 선동에 정치권이 편승하고 끝내 사회혼란을 부추기는 참사의 정치적 소모, 정말이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과이불개(過而不改·잘못을 고치지 않는 것이 바로 잘못)’-‘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다. 박현모 여주대 교수의 추천 이유는 신랄하다. 우리 지도층 인사들의 정형화된 언행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당․야당 할 것 없이 잘못이 드러나면, “이전 정부는 더 잘못했다’ 혹은 ‘야당 탄압’이라고 말하고 도무지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영국 콜린스 사전이 뽑은 올해의 단어는 ‘퍼머크라이시스’(permanent+crisis, 영구적 위기), 장기간의 불안정과 불안이란 뜻이다. 팬데믹, 전쟁, 인플레이션, 경기침체까지, 올해의 단어들은 어느 해보다 암울하다.
새해는 위기의 파도가 더 험할 것 같다. 세계는 지구적 기후재앙과 양극화에 따른 공동체의 붕괴에 직면하고 있다. 급격한 정치·경제·사회의 전환에 실패한 개인-집단-국가의 미래는 어떨 것인가. 한국 사회는 이 역사적 전환기의 시련과 위기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앞에서 우리 정치는 나날이 ‘내전(內戰)’ 중이다. 그 위기를 풀 주체는 누구인가? 그럴수록 대통령의 몫은 중요하다(정운찬). 한국의 성공은 그의 성공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므로-.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7개월을 넘기며 제 궤도에 올라서고 있다. 좌파세력의 조직적 대선 불복과 집권세력의 무능·실책이 겹쳐 한국은 참 아슬아슬했다. 대통령의 위기 극복, 야권의 뜬금없는 공격과 ‘이재명 사법 리스크’ 공도 적지 않다. 대통령은 노동-연금-교육의 3대 이슈를 내세우며 국정 기조를 다듬고 있다. 그는 이제, 정치를 주도해야 할 때다. 사심 없는 비판에 귀 열고, 야당과의 타협에도 앞장서며, 초심 그대로 ‘보수의 품격’을 지켜가야 할 터다.
”세상이야 다단해도 봄은 오고 또 가누나/묻노라 저 세상일 얼마나 아득하여/한평생에 몇 번이나 이렇게 울리려느냐.“ 세모를 읊은 용재(容齋) 이행(李荇)의 시 마녕 어차피 썰렁하고 스산하지 않을 수 없는 세모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눈 딱 감고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문명의 종언을 피하고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서 부단히 미래를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고 한 줄리오 퀴리의 경구처럼 말이다. 한 해를 보내며 새삼 다짐할 바는 혼란 속이 평정, 불안 속의 평상을 되찾아가는 것이다.
며칠 뒤면 계묘(癸卯)년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를 것이다. 지금은 그저 온갖 아쉬움과 두려움 속에서 저물어가는 이 한 해를 곱게 전송하자. 그리고 이 두려운 한해가 우리에게 남겨준 귀한 뜻을 조용히 가려내자. 새해에는 국민분열-정치혼란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 대신 ‘서로 함께’를 우선하는 선량한 국민이, 망상적 선전·선동에 바쁜 ‘사악한 무리’보다 언론의 존재가치를 생각하는 ‘책임 있는 언론’이 날로 세를 얻어갔으면 좋겠다. 그런 소망들을 가슴에 품고 ‘찬란한 미래’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자. 아듀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