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탄다'며 그냥 둬선 안돼... 진료 받아야
“날씨가 따듯해지니 다들 꽃구경을 하며 신이 났는데 이상하게 저는 더 우울해졌어요. 아무래도 봄을 타는 것 같아요.”
차가운 겨울바람이 멈추고 옷차림이 가벼워지며 외출하기 좋은 계절, 봄이 시작됐다. 거리엔 꽃이 만개하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봄을 만끽하며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울한 감정을 호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최근 이유 없이 우울해지고 무기력함을 느낀다. 봄 타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가볍게 넘기기 쉽지만 이 같은 증상이 지속될 경우 ‘계절성 우울증’을 의심해야 한다.
계절성 우울증(SAD, Seasonal Affective Disorder)이란 말 그대로 계절적인 흐름을 타는 우울증의 일종으로 ‘계절성 정동장애’라고 불린다. 대부분 가을과 겨울에 증상이 나타나 봄과 여름이 되면 증상이 나아진다. 하지만 겨울철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매년 봄과 여름에 나타나는 ‘역계절성 정동장애(reverse SAD)’도 있다.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높은 초미세먼지 농도로 인해 외부 활동이 제한되면서 계절성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증가했다. 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봄철인 3월에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은 사람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건강관리협회는 최근 블로그를 통해 계절성 우울증 자가진단법을 제시했다. 2개 이상의 항목이 해당되고, 이러한 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된다면 계절성 우울증을 의심해야 한다.
계절성 우울증의 증상은 일반 우울증과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우울증은 불면증과 식욕저하를 보이는 반면 계절성 우울증은 단 음식을 자주 먹는 등 식욕이 늘어나고 잠이 많아지는 과수면이 특징이다. 하루 종일 무기력하게 누워 지내 활동량이 줄어들어도 쉽게 피곤해진다. 또한 의욕이나 집중력이 떨어지고, 소화불량‧수면장애‧극심한 피로감 등이 나타날 수 있다. 계절성 우울증 환자 조모(27, 김해시 활천동) 씨는 “어느 날부터 무기력하고 자도 자도 피곤해 가벼운 몸살인 줄 알았는데,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다. 평소 체중관리를 꾸준히 하던 내가 갑자기 탄수화물만 찾게 되길래 이상하더라”라며 “지인의 말로 병원을 방문했는데, 우울증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대부분은 계절이 지나면 증상이 자연스레 호전되지만, 이런 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되거나 매년 반복된다면 만성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
계절성 우울증이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햇볕 즉 일조량 때문이다. 일조량은 가을과 겨울에 급격히 적어지는데 사람의 신체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호르몬을 조절한다. 여기서 일어나는 급격한 호르몬 변화로 정서적 혼란을 일으킨다. 이때 항우울 효과가 있는 세로토닌이 줄어들게 되어 쉽게 우울함을 느끼게 된다. 마치 성인 여성이 갱년기에 호르몬 불균형으로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것과 같다. 또한 밤이 길어지는 가을, 겨울철 숙면을 유도하는 멜라토닌 분비가 증가해 무기력해지는 영향도 있다. 그렇다면 일조량이 증가하는 봄에는 왜 계절성 우울증에 걸릴까.
추운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갑작스러운 기온 변화에 생체 리듬이 깨지게 된다. 봄철 증가한 일조량이 우리 몸에 멜라토닌을 더 적게 분비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이로 인해 수면시간이 감소하면서 일주기와 수면 주기가 변화한다. 충분하지 못한 수면은 우울함을 악화시킬 수 있다. 또한 햇빛에 노출되면서 세로토닌 분비가 활성화될 때 세로토닌이 과도하게 분비되면서 우리의 감정 조절에 영향을 미쳐 불안 수준을 높인다. 이외에도 꽃가루 알레르기와 같은 알러지 반응이나 체내 호르몬 변화, 면역력 감소 등 다양한 원인이 있다.
하지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원인은 바로 ‘상대적 박탈감’이다. 겨울철 우울증 환자들은 우울증 기간 동안 신체적으로 늘어지는 느낌을 갖는 반면 봄철 우울증 환자들은 초조감을 느낀다. 한 해의 시작은 1월이지만 봄을 맞이하는 3월부터 본격적인 1년이 시작된다. 개강이나 상반기 취업 시즌, 승진 등이 맞물리며 심리적 압박을 받는 청년들이 우울증을 겪는 경우가 많다. 청년들은 새로운 상황에서 오는 부적응과 소외감을 느끼고,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이처럼 환경적인 변화가 큰 봄에 우울증이 가장 심화된다. 봄철 우울증을 겪은 대학생 이모(22, 부산시 남구) 씨는 “봄이 되고, 새학기가 찾아오면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든다”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져 가끔 현실도피를 꿈꾼다”고 말했다.
봄철 우울증은 증상이 심각할 경우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봄인 3~5월에 우울증과 자살률이 가장 높다. 일본은 봄철인 3월과 5월 사이에 자살률이 가장 높으며, 남반구에 있는 호주는 봄이 시작되는 10월에 자살률이 가장 높다.
편한숲 정신건강의학과 이지상 원장은 “가장 우울증이 심한 겨울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기력조차 없지만, 봄이 되면 몸에 에너지가 생기면서 충동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다”며 “실제로 봄에 우울증과 양극성 정동장애가 재발하는 환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따라서 봄철 우울증은 단순히 ‘봄을 탄다’며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계절성 우울증 극복을 위해선 반드시 정신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정신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병원을 찾지 않고 스스로를 방치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우울증은 증상이 심한 경우 혼자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는 병이 아니기에 반드시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한 계절성 우울증은 일조량의 영향을 받는 만큼 햇볕을 자주 쬐면 체내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 합성에 관여하는 비타민D가 증가하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가 인지하고,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것이다. 생활리듬이 깨지면 무기력감으로 이어지기 쉽다. 스트레칭이나 요가 같은 가벼운 운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신체 활력을 돋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 원장은 “취미 생활을 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만의 영역을 세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러한 세팅된 삶에 만족감을 느끼며 자존감을 채워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