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빅뉴스 대표 정태철
최근 이화여대에서 고졸 직장인들에게 대학 입학 기회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평생교육 단과대학을 설립하려다가 학생과 졸업생의 거센 항의를 받고 그 설립을 취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교육부가 평생교육 단과대학을 설립하는 대학에게 재정을 지원하겠다는 사업에 이대가 응모해서 전국 10개 대학과 함께 지원 대상자로 선정된 데서 비롯된 모양이다.
언론, 블로그, SNS 등에서 이를 두고 논란이 무성하다. 학생 의견을 무시하고 총장이 독단적으로 대학 의사 결정을 주도했다는 주장도 있고, 총장이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을 캠퍼스로 경찰을 불러 강제로 진압했다는 비난도 있다. 또한, 이번 평생교육 단과대학 설립 사업을 비롯해서 각종 재정지원을 통해서 대학에게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등 무리하게 대학을 길들이려는 교육부의 고압적 행정이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다른 대학 문제에 대해 내부의 자초지종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교육부가 정책을 억지로 밀어붙인 면도 있을 것이다. 최근, 이대 상황이 평생교육 단과대학 사업에 선정된 다른 대학으로 확산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그런데 사태의 발단이 된 고졸 직장인들에게 대학 입학 기회를 주자는 제도에 대한 찬반 논쟁은 우리 사회의 중대한 문제와 연관돼 있다.
27년 전, 내가 2학년밖에 없던 신설학과의 신임교수가 되고 1년쯤 지났을 때다. 학교본부는 우리 학과도 이제 3학년이 생기니 편입생을 받아야 한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학생 대표들이 그걸 알고 나에게 편입생을 뽑지 말라고 항의했다. 편입생 제도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던 나는 그냥 나라의 법에 편입생을 뽑게 되어 있으니까 뽑는 거라고 생각했고,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학생들과 말로 티격태격했지만, 험한 사태로는 번지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 편입 지원생 수십 명을 일일이 면접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들이 작성한 자기소개서를 읽게 됐다. 대개 실업계 고등학교를 거쳐 전문대학을 졸업한 그들은 학교 졸업 후 바로 직장생활을 했지만, 전문대 출신 차별이라는 서러움에 4년제 대학에 편입하려 한다는 사연들을 자기소개서에 빼곡히 적어 놓았다. 그들이 기록한 편입 사유는 그런 학생들을 접할 기회가 없던 나에게 구구절절이 애절했다. 이후로 학력 차별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전문대를 졸업한 사람들에게 4년제 편입 기회를 주는 것은 지극히 공정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게 됐다.
그 다음 해, 또 편입생 모집 시절이 다가 왔다. 학생 대표들이 또 나를 찾아와 편입생 선발은 재학생들의 ‘학습권’ 침해이며 학교의 ‘학위장사’라는 논리로 편입생을 뽑지 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의 대처는 전 해와 달랐다. 편입은 계속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편입생을 뽑지 않는 대학이 있다면, 그게 부당한 처사라고 나는 학생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연례행사 같았던 편입에 대한 재학생들의 묘한 ‘텃세’는 그때부터 우리 학과에서 사라졌다. 나는 편입생들이 편입 후 재학생들과 잘 어울리게 하려고 내심 신경을 썼다. 그들의 편입 당시 수능 점수나 영어 점수는 높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취동기는 뚜렷하고 강했다. 그 성취동기가 ‘사실’과 ‘의견’의 차이도 모르는 학생들로 하여금 멋진 기사를 작성하게 하고, 토익 900점도 만들고, 건실한 사회인이 되게 했다.
4년제 대학들이 고민할 문제는 편입생을 어떤 기준으로 뽑고 어떻게 교육시켜 졸업시키느냐는 것이지, 대학이 편입 기회를 아예 차단할 이유는 없다. 편입생 선발에 따른 대학 내 잦았던 분란은 요새는 대학 사회에서 아예 자취를 감췄다. 고졸 직장인들에게 대학 1학년 입학 기회를 주자는 아이디어도 평생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편입생 경우와 다르지 않다. 평생교육 단과대학 문제는 고졸 직장인들을 어떤 기준으로 선발하고 어떻게 교육시킬 것이냐의 문제일 뿐이다.
맹자는 군자삼락(贤人三樂)이라 해서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 중 하나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즐거움이다. 깊은 뜻은 몰라도, 군자는 자기가 가진 지식을 교육을 통해서 남에게 베풀고 공유하는 일을 즐거움으로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맹자가 왜 하필 ‘영재’를 얻어 교육해야 즐겁다고 설파했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세상 피교육자가 다 영재는 아니지 않은가.
여기서 지칭하는 영재가 인성과 지적 능력을 동시에 갖춘 인재라는 의미였으면 좋겠는데, 한국식으로 말하면, 영재는 특목고 학생들이나, 수능이나 내신 등급 높은 일류대 학생을 지칭하는 듯해서 맹자 말씀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미인 대회 우승자가 아니라 ‘우생순’ 핸드볼 팀의 44세 오영란 선수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얼굴은 김태희가 아니라 엄마 품에서 방긋 웃는 ‘내 아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세상사의 기준에는 절대적 잣대가 없다. 모든 게 상대적이다. 학업 성취도인 평점과 영어 점수 같은 보편적 스펙은 학생을 평가하는 ‘편리한’ 기준은 될지언정 ‘옳은’ 척도는 아니다. 그동안 대학에서 영재 아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가지게 된 교육적 소신 중 하나는 영재만이 ‘좋은’ 학생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화제였다. 이 영화에서, 우주를 항해하다가 수십 년 만에 지구로 돌아온 아버지는 떠날 때와 거의 같은 젊은 모습이었지만, 지구에 남아있던 딸은 파파노인이 되어, 부녀가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아버지는 우주를 수십 년 여행했지만 시간이 천천히 흘러서 늙지 않았고, 지구의 딸은 정상적으로 수십 년 시간이 흘러 폭삭 늙어버렸다. 1905년 26세의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상대성 이론은 물체가 빛의 속도와 가깝게 움직이면 거리가 축소되고 시간이 늦게 흐르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이론은 다른 물리학자들에 의해 속속 증명됐다. <인터스텔라>는 바로 상대성 원리가 반영된 영화였다.
‘똑딱’ 하는 1초가 언제 어디서나 같지 않다는 사실, 즉 이 세상의 시간도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세상의 진리가 절대적이라는 인류의 믿음을 근본부터 흔들었다. 역사 저술가 폴 존스가 그렇게 설명했다. 그는 20세기를 상대주의의 시대로 정의했다. 과거의 미술은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했으므로 아름다움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있었지만, 상대주의 시대가 도래하자, 아름다움을 주관적으로 묘사하는 입체파나 초현실파가 등장하면서 아름다움의 절대적 정의가 깨졌다고 존스가 설명했다.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으로 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나타난 것도 상대주의적 세계관이 문학에 반영된 것이라고 존스가 지적했다.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상대주의가 20세기와 21세기의 시대정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여전히 절대주의의 망령이 떠돌고 있다. 성적이 나쁜 학생은 한국에서 무조건, 또는 절대적으로 한심한 놈, 미래가 막힌 놈으로 낙인이 찍힌다. 여성의 절대적 미의 기준은 서울 강남의 성형외과 의사들이 만들어 간다. 그래서 여인들 아름다움의 다양성과 개성이 사라지고 있다. 아파트 평수, 일류대학, 전문직, 자동차 배기량, 연소득은 지나치게 물질적인 부동의 성공 기준이다. 남이 볼 수 없는 자기가 사는 집은 비록 월세에 쪽방 신세일지라도, 남 눈에 띄는 자가용은 번쩍이는 외제차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서민 아파트 주차장에 외제차가 보이는 현상은 절대 기준을 추종하는 '허세'일 뿐이다. 내내 전교 일등을 하다가 한 번 이등으로 떨어졌다고 세상을 하직한 여고생의 가해자는 다름 아닌 이런 절대적 성공 기준에 따른 강박관념이다. 그래서 양적 성공 기준이 이데올로기가 되어 개개인을 지배하는 사회는 참 슬픈 공간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성공한 영재들은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할 의사들이 환자를 성희롱하고, 정의로워야 할 검사들이 범죄자가 되는 일이 줄줄이 생기고 있다. 교수도 오명 대열에 자주 끼이고, 국민을 섬겨야 할 고위 공무원이 국민을 무시하는 막말을 한다. 스펙도 좋고 인성도 좋은 엘리트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위 1% 영재들의 끊이지 않는 사건 사고들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절대주의적 인간 평가 관습이 인성 좋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구조적 위기의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소신, 신념, 인성은 스펙을 넘지 못한다. 스펙은 배타적이다. 정량적 수치에서 남을 눌러야 내가 산다. 마치 올림픽 양궁경기 하듯 한국사람 인생은 곧 살벌한 포인트 경쟁이다. 단 한 번 실수가 인생 메달의 색을 가른다. 한국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어렸을 적에는 성적이란 수치에, 청년기에는 학교 서열이란 수치에, 사회인이 되면 연봉이란 수치에, 가족이 생기면 아파트 평수라는 수치에 인생이 억류돼 있다. 이게 한국병이다. 한국병 치유의 '작은' 일환으로, 물질적이고 절대주의적 스펙보다 정신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인성의 차원에서 고졸 직장인들을 대학이 포용해주면 안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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