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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연쇄살인범' 스릴러에 담긴 여성 해방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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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연쇄살인범' 스릴러에 담긴 여성 해방의 서사
  • 경남 양산시 박세진
  • 승인 2016.10.24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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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영 감독의 <사랑의 노예>, 성적 도구로 납치된 여학생 구출로 구원 찾은 두 여성 그려 /경남 양산시 박세진
영화 <사랑의 노예> 스틸컷(사진: 네이버 영화 제공).
"젊을 때 사랑 많이 해봐라!"는 어른들의 말이 그저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는 섬뜩한 사실이 뇌리를 강타할 때,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음을 또 한 번 실감한다. 그 말에는 보통명사로 정의될 수 있는 사랑 따위는 없으니 각자 자신만의 사랑을 잘 꾸려나가기 바란다는 인생 선배들의 절박한 심정이 담겨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사랑이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고 남의 사랑에 함부로 보편적 잣대를 들이밀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될 때, 영화 <사랑의 노예>(2016)는 우리 마음에 온다. 이미 사랑에 보편적 기준 따위를 적용할 수 없음을 인정한 사람들에게 벤 영 감독은 ‘부부 연쇄살인마’ 이야기를 꺼내든다. 존 화이트(스티븐 커리)와 이블린 화이트(엠마 부스) 부부가 그 주인공이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납치한 여학생들을 감금하고 성폭행하며 자신들의 사랑을 돈독히 유지해나간다. 말로만 들으면 ‘그게 무슨 사랑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엠마 부스의 연기는 그들의 사랑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그들은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도 비키(애슐리 커밍스)라는 여학생을 납치하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존이 비키에게 소유욕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블린은 비키에 대한 존의 집착에 질투심을 느껴 비키를 예정일보다 일찍 죽이자고 한다. 한편 비키의 엄마 매기(수지 포터)는 자기 몰래 파티를 간 비키가 돌아오지 않자 이혼한 전 남편과 함께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하러 간다. 경찰은 그 나이 때 흔히 있는 일이라며 다음 주 월요일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실종처리를 하자고 한다. 며칠 뒤 매기의 집에 남자 친구와 함께 떠난다는 딸의 편지가 오고, 그걸 발견한 전 남편은 "당신이 다시 합치자는 말을 듣지 않으니 딸이 이렇게 도망가지 않느냐"며 역정을 낸다. 매기는 운다. 비키가 그럴 리 없다고 울고, 남편과 이혼한 자신의 선택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운다. 이후 영화는 이블린과 비키의 미묘한 신경전으로 이어진다. 비키는 이블린에게 계속해서 당신이 하고 있는 게 진짜 ‘사랑’이 맞느냐고 묻는다. 이블린은 그 물음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존에게 되묻는다. “당신 나 사랑하지?”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제목을 떠올리게 된다. 사랑의 노예. "그렇다"는 존의 응답을 받은 이블린은 미소짓는다. 그렇게 한 여자가 웃고 있을 때, 다른 여자는 울고 있다. 비키의 엄마 매기다. 매기는 편지에 쓰여 있던 남자 친구 제이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딸의 편지가 사실은 제이만 알 수 있는 암호문으로 적혀있단 사실도 알게 된다. 전 남편과 매기, 그리고 제이는 다 같이 편지에 적힌 주소로 비키를 찾아 나선다. 아이를 잃어버린 장소에 돌아가 아이 이름을 부르며 뛰어다니는 부모처럼, 매기는 울부짖는다. 암호문에 적혀있던 장소에 비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히 그 시간, 매기가 울부짖으며 딸이 이 집에 있다고 소리치는 바로 그 맞은편 집에서 비키는 수면제 먹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키는 수면제를 먹는다. 그렇게 체념하듯 수면제를 먹던 비키는 목에 칼을 대며 빨리 먹으라고 소리치는 이블린에게 속삭인다. “칼로 나를 찔러.” 그녀는 칼로 비키를 찔렀을까? 정답은 아주 쉽고 또 어렵다. 우선, 그녀는 찔렀다. 하지만 비키는 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찌른 건가. 바로 남편 존이다. 건너편에서 서성이는 매기를 바라보던 존은 아직도 안 죽였냐고 소리치며 이블린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이블린은 존을 찌른다. 이전에 보여주던 사랑의 광기는 온데 없이, 그녀는 찌른다. 조용히 남편의 배를, 그러나 여러 번, 찌른다. 영화는 비키가 무사히 연쇄살인범들로부터 탈출하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스릴러의 서사를 장착하고 있는 이 영화가 강조하는 지점은 극적인 탈출이겠지만, 그걸 한 소녀의 탈출로 보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힘은 모두 사라진다. 오히려 이 영화는 남성으로부터 여성의 극적인 탈출이라고 봐야한다. 존은 마치 비키와 이블린을 ‘노예’처럼 다루지만, 사실 비키라는 여성을 매개하지 않고는 이블린과 사랑을 나눌 수 없는 불구자다. 오히려 존이 그녀들의 노예라는 것을 알게 된 정확히 그 지점에서, 이블린은 존을 칼로 찌른다. 노예는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은 어두컴컴한 집에서 햇빛이 비추는 밖으로 걸어 나간다. 비키는 엄마의 이름을 부르고, 낙심한 채 차를 타고 돌아가려던 매기는 비키에게 달려간다. 전 남편의 다시 합치자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혼자인 삶을 선택한 매기가 결국 비키를 구원한 것이다. 아버지와 남자 친구는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마치 그녀들이 다시 만나기를 바라지 않은 것처럼. 스릴러를 보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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