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뱅이와 장님 이야기가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 대신 앉은뱅이가 두 눈이 되어주고,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 대신 장님이 두 다리가 되어 주는 이야기다.
그런데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와 아주 흡사한 상황이 실제로 존재한다. 바로 대구에 거주하는 장인철(62) 씨와 송휘윤(79) 씨의 사연. 장 씨는 우리나라에서 희귀한 성인 조로증 환자이고, 송 씨는 다리절단 장애인이다. 장 씨의 왼쪽 눈은 노화가 심해 시력을 잃었고, 오른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로 시력을 완전히 잃기 직전이다. 불편한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해 송 씨가 천천히 걸으면,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장 씨가 그의 뒤를 따라간다. 둘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장 씨가 앓고 있는 병은 보통 조로증이라 부른다. 의학에서는 ‘허친슨 길포오드 조로증 증후군,’ 혹은 ‘베르너 증후군’이라 부르는데, 이 병은 환자에게 어린 나이부터 노화현상이 나타나는 치명적이고 희귀한 질환이다. 아직 마땅한 치료법도 없는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조로증에 걸렸다고 보고된 환자는 장인철 씨 포함해 단 2명이었지만, 1명이 사망해 현재는 장 씨가 국내 유일의 조로증 환자다(추후 보고된 환자가 있을 수 있음). 조로증에 걸린 환자는 평균 수명이 20세이나 장인철 씨는 60세를 넘겼다. 신체 나이로는 120세를 넘었다고 한다. 120세 노인의 몸을 가진 장 씨는 일상 생활조차 힘에 겨워한다. 그는 어쩌다 이 병을 앓게 됐을까?
그는 7세 때 가족으로부터 버려졌다. 이후 가족도 모른 채 어린 시절을 보호시설에서 지내다가 줄곳 혼자 살게 되었다. 자신조차 병의 원인을 모른다. 5년 전, 수소문 끝에 그는 기적처럼 어머니를 찾았지만,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현재는 다시 연락이 끊긴 상태이다. 대구파티마병원 의료사회복지사 이용철 씨는 “처음 이 환자를 봤을 때 사실 놀랐다. 내 주위에 이런 환자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장인철 씨가 응급실에 실려와서야 처음으로 이런 환자의 존재를 국가가 알게 되었다”고 그를 처음 본 상황을 설명했다.
장 씨는 5년 전 SBS 프로그램에 사연이 처음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모금이 진행돼 큰 돈이 그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장 씨는 자신에게 전해진 성금을 불우 이웃들에게 기부해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후 ‘산타클로스’라고 불리던 장 씨는 최근 병원비가 미납될 정도로 상황이 어려워졌다. 사회복지사 이용철 씨는 “아픈 환자를 두고 돈을 생각하는 게 도리가 아니어서 치료를 계속 해 주었다”고 전했다.
그의 몸 상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3개월 전, 장 씨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고관절이 부러져 수술을 받게 됐다. 이용철 씨는 “조로증으로 인해 어떠한 수술도 위험 부담이 크지만 당장 목숨이 위태로워 수술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시력은 어떨까? 대구 가톨릭 연합의원 측은 장 씨의 왼쪽 눈이 반원 조직으로 각막이 뒤덮여 있어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이며, 오른쪽 눈은 혼탁한 상태로 시력을 잃고 있는 데다 호전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조로증으로 인한 합병증과 노쇠한 몸의 면역력도 문제다.
이런 악조건 속에 일상생활이 가능할까? 혼자서는 생활이 어려운 그에게 기적 같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몸이 불편한 장 씨를 26년째 돌봐주는 이는 같은 아파트 옆 동에 거주하는 송휘윤 씨. 송 씨는 “동네에서 우연히 인철이를 만났다. 몸이 불편해 보여 한 번 도와주게 됐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 송 씨 역시 왼쪽 다리를 허벅지 위 부분까지 잃은 다리 절단 장애인이다. 어릴 적 교통사고를 당해 평생을 불구로 지냈다. 자신의 몸도 가누기 힘든 송 씨는 매일 아침 장 씨 집을 찾아가 잠들 때까지 보살펴준다.
송 씨에겐 4명의 자식이 있다. 자식들은 각지에서 취업하고 결혼까지 해서 분가했고, 지금은 아내와 단 둘이 산다. 하지만 송 씨 아내도 한 달 전 척추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 중이다. 장 씨에 비해선 송 씨는 건강한 편이다. 대구파티마병원 이용철 씨는 “송휘윤 씨는 혼자서 병원을 자주 온다. 자신의 몸 상태를 가끔 확인한다”고 전했다. 송 씨는 외로운 장 씨와 우정 그 이상의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다. 장 씨가 고관절 수술로 인해 입원했을 당시, 송 씨는 매일같이 병원을 찾아와 간병했다. 1~2시간 정도가 아니라 잠들 때까지 하루종일 간병한 뒤 귀가하곤 했다. 송 씨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철이가 앞을 잘 보고 다녔는데, 이제는 시력을 잃어 더 안타깝다”고 말했다.
몸이 불편한 장 씨를 대신해 각종 반찬과 식사 준비는 송 씨의 몫. 부족한 것이 있으면 송 씨가 직접 차를 몰고 나가 마트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한다. 청소와 같은 장 씨의 집안일은 매주 목요일마다 오는 자원봉사자들이 해준다.
그들의 하루 일과는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다. 아침에 송 씨가 장 씨 집으로 찾아오면 일과가 시작된다. 아침을 먹고 난 뒤,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는 것으로 둘은 오전을 보낸다. 점심을 먹은 후, 둘은 공원에 나가 친구들을 만나거나 바깥 공기를 마신다. 하지만 오랫동안 바깥에 있으면 장 씨의 건강이 위험하기 때문에 일찍 집으로 들어온다. 저녁을 먹고 8시가 되기 전, 장 씨는 잠자리에 든다. 장 씨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송 씨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장 씨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기를 원한다. 장 씨는 “나보다 불쌍한 사람들이 더 많다. 내가 도와줘야 할 사람이 많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방송국을 통해 모금된 기금을 기름이 없어 보일러를 사용하지 못하는 독거노인에게 기름을 사주고, 옷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옷을 사주는 등 많은 도움을 베풀었다.
얼마 전, 장 씨가 병원비가 미납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릴 때도 구원의 손길이 기적처럼 다가왔다. 충남 공주에 본부가 있는 도서 출판사 ‘큰글사랑’ 기획실장 조지형 씨는 “저희가 봉사하던 중에 알게 된 분이 정인철 씨"라며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아서 저희가 다시 모금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모금은 ‘키다리 펀딩’이라는 모금단체가 일정 수수료를 받지 않고 도와주기로 했다. 키다리 펀딩 대표 정석현 씨는 “소식을 듣고 고민할 것도 없이 도와주고 싶었다. 마침 뜻이 맞는 분들이 있어 모금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또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엔터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고, 페이스북 30만 팔로워를 보유한 유정호 씨는 “큰글사랑과 같이 모금을 도와주기로 했다. 도움이 되고 싶다”며 자신의 SNS계정에 장인철 씨의 사연을 올려 모금에 동참하기도 했다.
1주일간 진행된 모금운동을 통해 목표금액인 500만 원에서 약 15% 모자란 427만 1000원이 모금됐다. 병원 미납액 152만 9090원이 지불됐고, 남은 274만 1410원은 장인철 씨 개인계좌로 직접 지급됐다. 송 씨는 “도움을 바란 건 아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다. 필요한 곳에 쓰이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장인철 씨의 집은 휑하다. 가구는 최소한의 필요한 만큼만 있고 서랍장 가득 약이 쌓여있다. 이용철 씨는 “솔직히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다. 그의 집을 가면 텅 비어있을 것이다. 자신이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걸 알기 때문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가재도구를 치우는 것 같다”고 전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사람들은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 씨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 그는 “남들이 도와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겉으로는 절망이 가득해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두 사람의 동행은 현대인의 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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