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 강제징용돼 일본의 섬 군함도에서 처절하게 노동을 착취당하고 목숨을 잃어야 했던 조선인이 흘린 피의 역사를 그린 영화 <군함도>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미처 그리지 못한 또 다른 슬픈 역사가 있다.
“남해군청 앞에서 아버지를 본 게 마지막이었어요. 그 때가 아홉 살이었는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광복을 두 달 남짓 남겨둔 1945년 6월 20일경,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당시 아홉 살의 강갑윤(81,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씨는 고향이었던 경남 남해군청 앞에서 줄 맞춰 서 있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그 중에는 강 씨의 아버지인 강채신(당시 48세) 씨도 있었다. 그날이 아버지를 본 마지막 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강채신 씨는 그날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당했다. 남해에서 부산을 오가는 배를 몰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강채신 씨가 강제로 끌려가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이 강 씨의 집으로 몰려들었고, 그의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대성통곡했다.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강채신 씨는 배를 타고 강제노역을 하던 중 미군이 한국과 일본 연안에 퍼부은 폭격에 배가 뒤집혀 사망했다고 한다. 강 씨는 “그 당시 나는 어렸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 들으니 하늘이 노래지고 말도 못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가족들은 바다에서 사망한 강채신 씨의 시신을 찾지 못해 묘소를 만들 수도 없었다.
9세 소년이던 강 씨는 이제 여든이 넘은 노인이 됐다. 그는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묘지 인근에 있는 국립 일제강제동원역사관 앞에서 휴관일인 월요일과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춥든 덥든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국내 강제동원 사망자는 제외된 반쪽짜리 역사관”이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목에 건 채.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해방 70주년을 맞은 2015년 12월 10일 부산시 남구 대연동에 들어섰다. 강제동원 역사관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을 추도하고, 당시의 참담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립 박물관이다. 강제동원역사관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일제 강제동원의 실태를 조사하고 자료를 공개한 최초의 박물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강 씨의 아버지를 비롯한 2만 3000여 명은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사망했거나 신체적 피해를 입었는데도 국외가 아닌 ‘국내’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는 이유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강 씨는 역사관이 개관되자마자 그 앞에서 지금까지 2년째 국내에서 강제동원돼 사망한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태평양 전쟁을 벌이기에 앞서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여 관할 영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관할 영역은 일본열도를 비롯해 조선, 대만, 사할린 등 식민지 다수를 모두 포함했다. 그래서 1939년에서 1945년까지 6년간 벌어진 태평양전쟁 때 조선인 수백만 명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강제 동원됐다. 이들 대부분은 탄광, 광산, 공사장 등의 노동자로, 전쟁을 위한 병력으로, 혹은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다.
해방 후 20년이 지난 1965년, 한국과 일본은 ‘한일기본조약’, 즉 한일협정을 맺어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징용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이 아닌, 대한민국의 인적·물적 피해를 모두 포괄한 배상금으로 총 8억 달러를 일본 정부로부터 받았다. 정부는 8억 달러의 배상금을 국가 경제 발전에 썼다.
피해자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박정희 정부는 1974년에야 ‘대일민간청구권보상법’을 제정했다. 1975년부터 2년에 걸쳐 일제 강점기에 발생했던 인명, 재산 피해 신고를 접수해 심사에 통과한 8만 3519건에 대해 총 91억 8769만 3000원을 보상했다. 이 중 사망자에 대해서는 징용당한 지역의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1인당 30만원씩, 총 26억 6560만 원을 지급했다.
하지만 당시의 인명피해 보상이 오직 ‘강제 동원 당시 사망자에게만 30만원 지급’이었기 때문에 생환 후 부상자를 비롯한 많은 피해자들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해 논란이 계속됐다.
그러던 중, 2005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미쓰비시를 비롯한 강제 동원에 가담했던 기업을 상대로 냈던 소송 중에 한국 외교통상부가 보관해온 1965년의 한일협정 관련 문서가 공개됐다. 그 후 2007년에 마련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2010년에야 비로소 강제동원 피해를 입은 사망자 뿐 아니라, 부상자, 당시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도 금전적 보상을 받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지원금 지급 대상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로 한정한 것. 2008년 강갑윤 씨는 국무총리 직속 독립기구인 ‘일제 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 진상 규명 위원회’에 국내 강제동원희생자가 보상에서 제외된 이유를 질의했다. 위원회 측은 “65년도 한일협정 당시 국내 동원 피해자는 보상금 요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일제 강점기에는 대부분의 국민이 피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서면으로 답했다.
2012년 이 위원회가 해체된 후 관련 업무는 행정자치부 과거사 관련 업무지원단의 ‘대일 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 지원과’가 잇고 있다. 이 부서의 관계자에게 "2008년의 답변과 같은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느냐"고 묻자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국내 동원 피해자는 법률상 지원 대상이 아니고 헌법재판소에서도 국내 동원 피해자는 보상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게 맞다는 결론이 났다"며 "안타깝지만 새로운 법이 제정되지 않는 이상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일제강제동원역사관 김우림 관장은 1인 시위를 벌이는 강갑윤 씨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역사관 측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서 국내 동원 피해자까지 조사해서 지원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나도 강 할아버지의 주장에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저희 역사관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권한을 가진 기관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재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의 실상을 조사하고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역사관의 한 관계자는 “보상금 지급에서 국내 징용자가 제외된 것이지, 역사관 전시자료에선 국내 징용자를 제외하진 않았다. 상설전시에서도 국내 징용자를 정확히 명시하고 강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관장도 “앞으로도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일제강제동원의 역사적 사실들을 규명하고 연구해 우리 역사관에 전시하겠다”고 덧붙였다.
강 씨도 보상금 문제가 일제강제역사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부산에는 관련 행정 부처가 없어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광운대학교 국제협력학부 김광열 교수는 지난 2011년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설립에 관한 법률안의 개정 방향에 관한 공청회'에서 “종래의 강제동원 피해 지원법에서는 지원 대상으로 국외 동원자만을 한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국외 동원자만을 지원 대상으로 한정하는 것은 태평양전쟁 당시의 동원 현실에 배치되는 것이며 차별적인 조치”라고 지적한 바 있다.
6년이 지난 지금도 김 교수는 그 때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강제동원 피해자를 국외에 동원된 사람들만으로 한정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는 행정편의적인 발상이다. 당시 한반도 내에서도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여 동원당한 사람들이 있다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라며 국내 동원 피해자가 보상에서 제외되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1975년 정부의 1차 보상금 지급 당시엔 이를 몰라 신청도 못했다는 강 씨. 일제강제동원역사관 앞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독한 시위를 계속하고 있는 강 씨는 “끌려간 사람들이 국내, 국외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라며 죽어서도 보상받지 못한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한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살아있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강갑윤 씨. 그는 방문객이 있든 없든 역사관 앞에서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