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인간(원시인)이 다른 최초의 인간(다른 부족 사람)을 만났을 때, 둘은 싸웠을까, 아니면 웃으면서 서로 인사했을까? 이것은 헤겔이 제기한 질문이었다. 그의 대답은 최초 인간들은 둘 중 하나가 죽든지 아니면 무릎 꿇고 복종을 맹세할 때까지 격렬하게 끝장 승부를 봤다는 것이다. 헤겔은 그 이유를 인간은 우월 본능, 명예욕,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간은 죽어도 남에게 지고는 못 사는 게 본능이란 거다. 그래서 홉즈는 사회를 사랑과 협조보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했고, 칸트는 같이 살면서도 속으로는 다들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인간의 속성을 "비사교적 사회성"이라 했다.
인간이 남보다 우위에 서려는 본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례는 세계 곳곳에서 보인다. 인육을 먹는 원시 식인 부족의 카니발리즘(cannibalism)은 전쟁 승리 후 패자의 인육을 먹음으로써 패한 종족에게 확실한 우위를 선포하는 행위였다고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해석했다. 영화<브레이브 하트>와 뮤지컬 <피가로의 결혼>은 무시무시한 초야권(初夜權: 신부의 첫날밤을 영주가 차지하는 권리)을 그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초야권은 유럽의 봉건 시대에 결혼할 처녀들은 영주와 첫날밤을 자기 신랑보다 먼저 보낸 후에야 신랑에게 양도됐다는 제도다. 이는 신분사회의 잔인한 인신예속적 풍습을 보여주는 사례로 종종 인용된다. 하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며 객관적 진실은 아니라고 하니 천만다행이다(김응종, <서양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 참조).
인류의 역사를 헤겔은 '인정받기 위한 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의 역사'라고 했다. 지배당했던 노예와 평민이 모멸감을 못 참고 검투사의 난, 프랑스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등의 시민혁명을 일으켜 민주주의를 쟁취했으며, 우리나라도 노비와 백성들의 굴욕이 동학혁명, 3.1운동, 4월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을 일으키게 해서 오늘날 후손들이 자유와 인권을 누리게 했다. 서양의 여성참정권, 흑백 차별 철폐도 사람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고 싶은 피지배 계층의 자각이 기폭제가 됐다. 그래서 헤결의 역사관은 정반합에 의한 변증법적이다. 최근의 업무 시간 외 카톡 금지법 논의도 우리나라가 이렇게 시대 변화에 따른 인권까지도 챙기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다.
발리우드라 불리는 인도에서 최근 개봉한 <화장실>이란 영화가 우리 언론에 소개됐는데, 그 내용이 자못 충격적이다. 인도의 많은 농촌 지역에는 집집마다 화장실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여성들은 동트기 전 새벽에 모두 일어나 단체로 들판에 나가 엉덩이를 내리고 그날의 볼일을 처리하며, 남자들은 대충 담벼락 등에서 일을 해결한다고 한다. 집안에 화장실 만들기를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과 이를 막으려는 남성들의 갑질이 이 영화의 내용이라고 하니, 인류 역사는 이렇게 아직도 동서를 가리지 않고 우월의식 싸움을 벌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인도도 아니고, 명예살인이나 비키니 동영상 논란이 일고 있는 일부 이슬람 국가도 아닌데, 최근 우리나라의 인권 모독 갑질 행태는 우리 사회가 아프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오늘(4일) 국방부는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육군대장 부부의 공관병 학대 갑질이 대부분 사실이라고 발표했다. 또 일부 경찰 고위직의 의경 상대 갑질도 횡행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끔직한 일이다. 몇 년 전의 땅콩 회항 사건, 라면 진상 상무 사건부터 최근의 대학원생의 교수 갑질에 대한 폭발물 보복 테러 사건, 대기업 회장 폭언 사건, 프랜차이즈 회사 사장의 가맹점 옥죄기, 모 감독의 여배우 학대 의혹 사건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행동이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다. 외형적 제도는 민주화되었을지 모르지만, 한 종편의 인기 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처럼 '닥치고' 남보다 우월하고 싶은 성공 지상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것이 산업화의 압축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배타적 이기주의로 증폭되어, 군, 회사, 학교 등 인간관계 곳곳에 우위에 선 사람들이 남을 배려하는 공동체 정신을 상실하고,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맛에 푹 빠진 '완장형 갑질' 문화가 심해진 듯하다.
나는 군 시절에 한 국가기관에 파견되어 그곳 경비실에서 일종의 보안 담당자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하루 종일 같이 근무하는 경비 아저씨들이 그 기관의 장부터 말단 사원까지 수십 명 직원들 인격을 죄다 평가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들의 평가 기준은 출입자에게 붙이는 경비의 거수경례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 그것 하나였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했다. 겸손한 사람은 경비의 인사를 깍듯이 받았고, 건방진 사람은 대충 받았다. 갑질은 평소 쌓은 인격의 결과이며, 그래서 갑질 중엔 '인격 파탄형 갑질'이 많다. 윗사람일수록, 자신의 인격이 바로 자기 주위의 감정노동자들에 의해서 일거수일투족, 시시각각으로 철저히 평가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남편의 미국 유학 시절에 파출부 일로 생활비를 벌었던 한 교수 부인은 매년 명절 때면 어김없이 양말과 음료수를 사서 아파트 경비 아저씨와 미화원 아줌마들에게 전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빌딩 미화원이었던 내가 아는 어느 교수는 누구보다도 대학 건물 미화원 아줌마에게 고개를 많이 숙여 인사한다. 그 연유를 모르는 미화원들 사이에서는 그 교수 인격자라고 칭찬이 자자하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가 교수가 되고 사장이 되더니 언제 올챙잇적 시절이 있었느냐는 듯이 아랫사람을 착취하는, 일종의 '보상적 갑질'을 해대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없는 상류층이 저지르는 '태생적 갑질'과는 또다르다. 모름지기 우리는 과거 경험을 교훈 삼아 윗자리로 오르면 오를수록 남의 인격을 존중하는 덕목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유교 경전 <대학>에는 ‘혈구지도(絜矩之道)’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혈’ 자는 잰다는 뜻이고 ‘구’ 자는 재는 척도를 뜻한다. 그래서 이 말은 ‘내 마음을 잣대 삼아 남의 마음을 재라’는 뜻으로 자신의 심정으로 남의 처지를 이해하라는 의미이며, 간단히 말하면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어느 날 지도 학생 몇몇 하고 칼국수를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이층에 자리 잡은 우리 일행은 음식을 주문한 뒤 모자란 컵과 젓가락을 더 가져달라고 몇 차례 종업원을 불렀다. 나는 그때마다 학생들이 일일이 “여기요!” 하고 육성으로 종업원을 부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왜 식탁의 벨을 안 누르냐고 물었다.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식당 알바할 때 가장 두려운 것이 손님들이 누르는 ‘딩동’ 하는 벨소리이며, 밤에 잠자리에 누워도 귀에서는 연신 ‘딩동’ 소리가 울리는 노이로제에 걸린다고 했다. 나는 그날 학생들에게 크게 배웠다. 식당 종업원을 대할 때도 혈구지도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우리나라 갑질 문화는 ‘빵셔틀’시킨다는 중학교 '일진 갑질'부터 툭하면 젊은이들에게 버럭 화를 낸다는 지하철 어르신들의 '나이 갑질'까지 지위와 연령을 가리지 않는 국민적 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는 음습한 풍토가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으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