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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미주리대 부학장: 즐거운 추석 파티로 타향살이 유학생의 향수를 달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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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미주리대 부학장: 즐거운 추석 파티로 타향살이 유학생의 향수를 달래다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08.2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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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보람 찾는 언론학 교수] 커티삭, 노래방, 그리고 팟락(potluck)의 추억

(11)-1 미주리대 부학장에서 계속:

1966년 미국으로 건너온 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우리 고유 명절인 설날과 추석을 그냥 지나친 해는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어도 음력 정초인 춘절만큼은 꼭 지키는 것처럼, 한국인인 나 역시 우리 명절이 오면 미주리 저널리즘 스쿨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과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을 내 집으로 모두 불러 잔치를 벌렸습니다.

명절이 되기 며칠 전부터 만나는 한국 학생들에게 “너, 아무 날이 추석인 것 알지? 그날 저녁에 내 집에서 잔치 할 테니까, 식구들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와. 그리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전하고”라면서 나는 명절 행사를 광고하고 다녔습니다. 학생들 중에는 공부하느라 여유가 없어서 명절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내가 일일이 챙겨 주지 않으면 그들은 설날이나 추석에 떡국 혹은 송편 하나 먹어보지 못하고 그냥 지내는 게 늘 나의 걱정이었습니다.

어느 해 추석에는 그 학기에 저널리즘 프로그램 연수에 참가하려고 여름에 막 새로 온 KBS의 이선재 씨 부부와 동아일보의 성하운 씨 부부 등이 유학생들 이외에 새로운 잔치 멤버로 등장했습니다. 당시 박사과정 중이던 나의 한국 조교들이 수강 과목에도 없는 추석 장을 어찌나 믿음직스럽게 잘 보았는지 추석 먹거리를 잔뜩 준비했고, 학생 부부들은 저마다 우리나라 음식을 한 가지씩 해왔습니다. 나와 아내 담당은 불고기 바비큐였습니다. 그 뿐이 아니라,  한국에서 유행이라는 노래방 시스템을 당시에 구입해서 드디어 미국 우리집에 설치했습니다. 

파티 참석자들이 음식을 한 가지씩 가져와서 하는 파티를 팟럭(potluck)이라 부른다. 음식이 모이면 훌륭한 뷔페가 되고 주인의 노고가 덜어진다. 미국에서는 팟럭 형식의 파티가 흔하다. 주인은 대개 밥과 국, 또는 고기 정도만 준비하게 된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그 시기에 연수를 왔던 경향신문의 김현섭 기자에게 부탁해서 구입한 나의 노래방 시스템에는 1300곡의 주옥같은 한국 노래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적어도 한 곡 정도는 선곡해서 TV 화면에 나오는 가사를 보고 따라 부르면 되는 편리한 기계였습니다. 과거 1980년대 유학생들은 그냥 육성으로, 혹은 기타 반주에 맞춰 파티 때 같이 노래를 부르곤 한 것에 비하면 비약적인 테크놀로지의 발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추석 파티의 노래방에는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에 나와야 할 가사가 뜨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영화 <닥터 지바고>의 장면이 배경 화면이 되어 기차가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는 화면 밑에 노래 <고향 산천>의 가사가 등장하기도 했고, 어떤 노래의 배경 화면으로는 오페라 장면이 펼쳐 지기도 해서 우리 모두가 실감 있게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 가사 화면이 지난 여름 내가 한국에 나가 있는 동안 우리 집에 와 있던 막내 아들 유진이가 하도 만지는 바람에 망가졌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노래방 기기 기스템. 1980년대 후반부터 노래방 기계는 전 세계로 퍼져서 미국에도 상륙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연수 온 언론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그들의 식구들 해서 거의 스무 명 이상이 모여 누구네가 가져온 음식이 맛있네 하면서 즐겁게 식사하는 동안, 기계를 좀 안다고 자부하는 저널리즘 박사 과정 학생 한 명이 끙끙대며 TV와 노래방 기기 손을 보고 있었습니다.

한편 술을 좋아하는 나는 오랜만에 만난 편안한 사람들과 술 한 잔을 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는 새로 온 기자들의 술 솜씨도 체크하고 그 중에서 올해에는 누가 내 술 친구가 될 것인지 탐색도 할 겸 해서 '시바스 리갈' 위스키를 한 잔씩 돌렸습니다. 그런데 조교였던 강승구(현 방송통신대 교수) 군의 눈매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강 군은 오래 전부터 나의 술 즐기는 버릇을 고치려고 작심했나 봅니다. 그는 파티 석상에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박사님, 술은 몸에 해롭습니다!”라는 '군자' 같은 소리를 하면서 나를 말렸습니다.

시바스 리갈. 한국에서는 고급 위스키로 알려져 있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마지막 연회 때 마셨던 술로 유명하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커티삭은 중급 정도의 위스키로 저렴하면서도 부드러워서 한국 유학생이나 연수 온 언론인들이 가장 즐겨 마셨던 위스키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성하운 기자가 “박사님, 강 군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마십시다. 비록 한국에서 주사파는 모두 감옥에 갔습니다만, 이곳은 미국이니까 '주사파'가 득세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서 모든 사람들이 까르르 웃었습니다. 아마도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 친북 주사파들이 검거되는 상황에서 술 마시는 사람을 주사파로 불렀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 잡채, 탕평채, 도토리묵 등 각자가 준비해 온 음식들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곳에 방앗간이 없는 탓에 송편만 없을 뿐이지 명절 음식은 다 모였습니다. 유학생 부인들은 나이가 어려서 음식 솜씨가 특출하기 어렵습니다만, 연수 온 기자들의 부인들은 언론재단에서 음식 솜씨 보고 선별해서 미주리로 보냈나 생각할 정도로 각양각색의 음식들 맛이 대단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밥을 함께 먹을 때가 유학생들에게는 망중한 같이 즐겁고 향수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강의 시간 틈틈이 점심이나 저녁을 먹으러 학교 근처 식당에 가면, 다른 미국 친구들은 모두 끼리끼리 모여 밥을 먹는데, 혼자 쓸쓸히 구석에서 앉아서 밥을 먹어야 하는 고통이 적지 않은 게 유학생들의 모습인지라, 이렇게 유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명절 음식을 먹는 날에는 유학생들은 평소에 먹는 양의 두 곱 절까지도 너끈히 먹어 치우곤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내 젊은 시절의 학생 때 모습이 떠올라 고통스럽기보다는 돌아가고픈 추억으로 내 마음을 채웁니다.

“자, 웬만큼 먹었으면 그만 아래층 마루로 들어가자. 곧 노래방이 열릴 테니까 노래들 준비하고. 그리고 싱글들은 잊지 말고 남은 음식들 모두 챙겨가. 룸메이트들도 좀 나누어 주고. 결혼한 사람들은 음식 싸가지 마. 다 싱글들 거니까” 하자, “교수님, 많이 싸가도 되는 거죠?” 하면서 은주 양이 베시시 웃었습니다.

은주 양은 이번 가을 학기에 광고학을 공부하기 위해 들어온 총기 있는 여학생인데, 나한테는 큰 적수였습니다. 곧이어 벌어질 노래방 잔치에서 그녀는 구성진 목소리로 인기를 독차지할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자네는 조금만 싸가. 난 나보다 노래 잘하는 사람 싫어.” 이렇게 내가 말하자, 사람들이 까르르 웃는다.

마침내 모두들 지하에 있는 넓직한 마루방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기계를 만지작거리던 조교 한 명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교수님, 오늘은 비디오 시스템은 없는 것으로 해야겠는데요. 자막은 나오게 했는데, 그림은 도대체 안 나오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요즈음 대한민국 사람들은 가수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나 노래 부른다면 확실히 빼는 법이 없습니다. 당시 노래방이 전국적으로 생긴 뒤부터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었습니다. 

새로 온 사람 순, 군대식으로 말하면 전입순으로 신참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노래를 부르고, 박수가 터져 나오고, 점수가 나옵니다. 그런데 점수는 70점을 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짰습니다. 심지어 콜롬비아 가수로 통하는 은주 양도 67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90점을 넘게 받을 확신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집에서 혼자 이리저리 점수 잘 받는 방법을 연구해 본 결과, 사람들이 한 10곡쯤 부르고 난 뒤에 부르는 노래 점수가 엄청나게 좋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회자가 나를 시키는 것을 몇 번이나 거절하면서 뒤로 내 차례를 미뤘는데, 적은 내부에 있다고, 집사람 '영숙 씨'가 내가 마이크를 잡자마자 내 비리를 공개하고 말았습니다. “이번 거는 점수 잘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 기계가 중간쯤 가면 점수를 무조건 잘 주거든. 저 양반이 지금 기다렸다 부르는 거에요”라고 하니 사회자가 “그런 비리가 있다면 순서를 다시 바꾸겠습니다. 마이크 이리 주십시오”라고 하는 게 아닙니까? “이 사람아. 내 곡목은 710번 <고향 산천>이야, 무조건.” 나는 이렇게 사회자의 '명령'을 무시하고 마이크를 꼭 잡고 음악이 나오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내 점수는 90점이 아니라 64점이었습니다. 기계의 비디오 시스템이 망가진 뒤로 점수 시스템도 망가졌나봅니다.

다시 한 곡만 더 하자는 간곡한 내 부탁에도 불구하고, 사회자는 지도교수의 마이크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넘겼습니다. 사람들은 내 사정하는 모습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그후 노래 순서는 기자들, 그들의 아내들, 꼬마 아이들에게까지 돌아갔습니다. 한 번씩 다 부른 것입니다.

그 다음은 돈을 태우고 노래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한 곡에 1달러씩 내고 부르기로 하고, 모인 돈은 '섰다' 식으로 해서 점수의 끝자리가 가장 높은 사람이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한 바퀴를 돌자 18달러가 모였습니다. 이제는 높은 점수가 아니라 점수의 '끗발'이 관심사였습니다. “힘든 공부 때려치우고, 매니저 얻어서 가수로 나서라”고 주위에서 말을 듣는 은주 양이 “이선희보다도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들어 가며 열창한 끝에 77점, 곧 '7땡'이 되어 1등을 했습니다.

그렇게 웃고 즐기는 사이에 밤 11시가 다 됐습니다. 그해 추석은 주중이어서 학생들은 다음날 수업이 있었고, 나도 오전 10시부터 강의가 있었습니다. 술이 숭늉처럼 구수하게 자꾸 목으로 넘어가는 것을 꾹 참았습니다. 한바탕 향수를 달랜 추석 잔치를 뒤로 하고 모두들 또 다음 날 공부를 위해 헤어져야 했습니다. 교수 시절, 명절 때마다 가졌던 즐거운 유학생 잔치는 지금도 생각하면 유쾌한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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