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1월, 테네시 주의 명문 사립대학인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의 부총장을 지내던 찰스 키슬러(Charles Kiesler) 박사가 미주리대의 새 총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취임 인사에서 총장은 미주리대를 정상의 대학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으며, 실제로 그는 미주리대가 연구나 그 밖의 다른 분야에서 다른 대학보다 뛰어난 실적을 올리도록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던 1992년 초 어느 날, 키슬러 총장은 해외 동문으로서는 한국 출신들이 한국 내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학장회의에서 미주리 대학과 한국과의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서울로 출장을 가겠다는 계획을 세우자고 말했습니다.
그 계획의 하나로 각 단과대학에서 한 명씩 14명으로 구성된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나는 저널리즘을 대표해서 준비위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문지가 한국이다보니 서울 출장 준비는 거의 내가 하는 꼴이 되었고, 나는 그해 5월 초부터 서울에 나가 그 기초적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계획의 요점은 우선 미주리대가 고려대학교와 자매 관계를 맺어 한국의 명문 대학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홍일식 교수가 고려대 총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두 대학 자매 협정이 쉽게 진척됐습니다. 특히 홍 총장은 나와의 친분 때문에 이미 미주리대학을 두 번이나 방문한 적이 있어서 별도의 설명 없이도 두 대학 간의 자매 대학 협정에 쉽게 동의했습니다.
두 번째 계획은 그 동안 지지부진했던 한국국제교류재단과 관계를 개선하여 약 110만 달러의 석좌교수(Endowed Chair: 외부 기관에서 조성된 기금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대학에서 연구나 강의를 맡는 교수를 석좌교수라 함) 기금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계획은 특히 미주리 출신 언론인들이 중책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미디어들을 활용해서 미주리대학 홍보를 극대화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계획이 면밀히 검토되어 8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의 미주리 대학 총장 일행의 출장 계획이 드디어 이루어 졌습니다. 총장실에서 선정한 출장 일행에는 총장 내외, 인문대 학장, 언론대학 학장, 상대 학장, 농대 학장, 개발 담당 부총장인 제인 어빈(Jayne Irvin), 국제 프로그램 담당 존 헤일리(John Heyle), 그리고 내가 포함됐습니다.
나는 사전 출장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5월에 서울에 와서 일을 봤으며, 호주와 뉴질랜드 등을 거쳐 7월 28일 컬럼비아로 복귀해서 출장 계획을 마무리해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총장 내외가 비행기 3등석 표를 샀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나와 언론대학장도 3등석표를 샀지만 중앙일보 고흥길 국장의 도움을 받아 이미 좌석을 비즈니스 클래스로 업그레이드해놓은 상태였습니다. 총장 내외가 이코노미 석을 타고 가는데 우리가 비즈니스 석을 타고 간다는 게 말이 안되는 일이어서, 나는 마침 그 해에 언론인 연수를 미주리에서 마치고 막 귀국한 중앙일보의 김창욱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 문제의 해결을 부탁했습니다. 결국 출발 하루 전날에서야 총장 내외도 비즈니스 석으로 좌석이 승급되어 한시름을 덜게 됐습니다.
총장 내외 이외의 다른 5명의 좌석 모두를 승급하기는 어려워서 그대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총장 내외, 딘 밀스 언론대학장, 제인 어빈 부총장과 나를 포함한 우리 그룹은 8월 18일 목요일에 미주리를 출발하여 서울에 다음날인 금요일 저녁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는 미주리 한국 동문회장인 유석렬 교수와 김덕중 교수(미주리 동문)가 나왔는데, 아주대 총장을 역임한 김덕중 교수는 대우의 VIP 전용 캐딜락과 수행 직원을 데리고 와서 총장 내외를 놀라게 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모두 힐튼 호텔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한국 방문의 첫 행사는 토요일 점심에 힐턴호텔의 피닉스 식당에서 성곡언론재단의 한종우 이사장이 마련한 오찬에 참석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종우 이사장의 배려로 코리아헤럴드의 기자가 와서 우리 일행을 취재했으며, 코리아 헤럴드 일요판에 커다란 사진과 함께 미주리 총장의 한국 출장을 알리는 기사가 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요일에는 내 큰 아들 안소니 내외가 차를 가지고 와서 총장 내외와 딘 밀스 학장을 모시기로 했는데, 총장이 나도 같이 가자고 요청하는 통에 내가 총장 일행의 투어 가이드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일행은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창덕궁 비원을 갔습니다. 비원 투어를 끝내고 점심 때가 되어 롯데호텔에서 중국요리로 점심을 먹었고, 인사동의 골동품 점을 돌아보고난 후, 우리는 월요일 스케줄을 위해 일찍 쉬기로 했습니다.
월요일 첫 행사는 9시 반에 한국국제교류재단에 가서 110만 달러 짜리 석좌교수 기금 조성에 관한 조인식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기금 중 일부로 10만 달러 수표를 재단으로부터 기부받았습니다. 점심 때는 총장과 4개 학장을 모시고 동아일보를 방문해서 인터뷰 취재에 응했고, 점심식사는 동아일보가 롯데호텔 중국식당에서 만찬을 제공했습니다. 곧 이어서 총장 일행은 3시에 약속된 이영덕 총리를 방문하여 한 시간 동안 한미 대학 간 교류에 대해 얘기를 나눴으며, 4시에는 문교부장관을 예방하고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6시 반부터는 미주리 언론대학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프레스센터에서 우수 동문에게 총장이 상패를 수여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수상자들은 대부분 국내 중진 언론인과 원로 언론학자들이어서 이날 행사는 신문에 크게 실렸습니다.
미주리 우수 동문상을 받은 사람은 신용순, 김영희, 하진오, 은종일, 김덕규, 이용승, 이장한, 이인형, 이주현, 임상원, 박영상, 한병구, 이광재 등이었습니다. 이날 80여 명의 전체 한국 미주리 저널리즘 동문들이 참석했는데, 나는 이들을 자랑스럽게 총장 일행에게 일일이 소개했습니다.
화요일에는 아침부터 고려대에 가서 자매 결연 조인식과 화기애애한 우정 교환을 마치고 홍일식 총장이 주최하는 오찬을 인촌기념관에서 가졌습니다. 나는 이 오찬에 참석치 못하고 대신 중앙일보가 신라호텔에서 광고주 400여 명을 초대해서 가진 ‘중앙일보 제2창간 및 섹션화’에 대한 설명회에서 초청 연사로서 참석해서 홍석현 사장과 점심을 같이 하면서 20분 간 연설했습니다. 저녁에는 조선일보에 가서 미주리대학과 조선일보와의 연구 인적 교류에 관한 서명식을 마치고 모두 방상훈 사장의 집에 가서 폭탄주를 돌리는 만찬을 가졌습니다.
수요일에는 일행에게 쇼핑할 시간을 주었으며, 점심에는 김덕중 교수가 힐튼호텔에서 한식으로 대접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녁에는 미주리대 한국 총동문회에서 김만제 포철회장(미주리 동문)이 주관하는 만찬을 가졌습니다. 목요일 오전에는 한양대를 방문했으며, 오후에 나는 중앙일보 사람들을 대상으로 호암아트홀에서 ‘언론의 디지털화와 신문’이라는 제목으로 2시간 동안 특강을 했습니다.
금요일에는 총장 일행 모두가 농대 관련 교류를 위해 수원의 농촌진흥청을 방문했고, 나는 점심에 친구인 유만조 사장과 마포에 있는 한 식당에서 불고기를 먹고, 유 사장이 하도 강권하는 바람에 홍재동에 사는 '박 도사'라는 사주 보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한 시간도 혼자만 가질 수 있는 틈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바쁜 일정이었지만, 이번 미주리대 총장 일행의 한국 방문은 그 성과가 매우 컸습니다. 한국에서 만난 마주리 동문들의 따뜻한 도움 덕에 우리 미주리 한국 방문단 일행은 모두 일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여행을 보냈다는 말을 오래오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