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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9층 사무실에서 내려 보이는 창 밖의 풍경이 왠지 쓸쓸하다. 방학 끝 무렵 대학 캠퍼스를 간간히 오가는 우산 쓴 학생들의 가방 맨 모습이 인생이란 중량 때문에 힘들어 보인다.
창 밖에서 눈을 돌려 책상 위 컴퓨터 인터넷 신문을 보니, 지자체장 입후보자 하마평이 무성하다. 공무원 하다가, 교수 하다가, 어느 날 그 자리를 박차고 선거판에 부나비처럼 뛰어드는 인물들이 연일 신문을 장식한다. 그들은 일생일대의 비장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은 그들 인생에 큰 변화를 줄 것이다. 과연 인생에서 선택이란 무엇일까?
인생의 선택에 대해 강렬하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치과의사에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로, 다시 카이스트 교수로, 그리고 교수에서 정치가로 변신한 안철수 의원이다. 그는 대선에 도전했다가 국회의원이 됐고, 지금은 ‘새정치연합’을 만들어 지방 선거에 임하고 있으며, 앞으로 4년 후에는 다시 대선에 나설 듯하다. 그에 대한 정치 평론가들의 칼럼과 대담이 자주 쏟아져 나오지만, 대부분 교수로 남아 있는 게 낫지 왜 그 진흙탕 정치판에 뛰어 들었냐는 핀잔이 대종을 이룬다. 사람 앞날은 알 수 없다.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그러나 왠지 학자풍인 그가 군계일학(群鷄一鶴)이 아니라 근묵자흑(近墨者黑)이 돼가는 것은 아닌지, 그 분 선택의 결말이 궁금해진다.
연예인 같은 셀레브리티들의 선택은 언제나 장안의 화젯거리다. 1976년, 7년 연상인 명배우 김지미 씨가 청년 가수 나훈아 씨와 결혼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여자 연상 커플이 희귀했던 당시에 이들을 보는 대중의 시선은 참혹하리만치 싸늘했다. 내 기억에, 당시 한 언론사가 뽑은 ‘가장 호감이 안 가는 남자 연예인’ 1위에 나훈아 씨, 역시 ‘가장 호감이 안 가는 여자 연예인’ 1위에 김지미 씨가 각각 뽑혔다. 그럼에도 그 후 그들은 행복했을까? 이들 결혼은 이혼으로 끝이 난 것은 물론, 김지미 씨는 “당시에 내가 무엇에 홀린 듯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무언가 안목이 없어 보였던 그들의 선택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세상 모든 범인(凡人)도 선택은 피할 수 없다. 나의 아버지는 1977년에 30년 공무원 생활을 접고 정년을 맞았다. 당시 아버지 세대는 공무원 연금의 첫 수혜자들이었다. 그들 모두에게 생소했던 연금제도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일시불로 거금을 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월 일정액을 연금으로 월급처럼 받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동료 공무원 15명과 같이 은퇴했는데, 아버지만 제외한 14명 모두가 일시불을 택했다. 누구는 그 거금으로 아들 집을 사주고 몸을 의탁했다 했고, 누구는 식당을 차려 새 삶을 시작했다 했으며, 누구는 주식에 투자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그분들 모두 뒤끝이 좋지 않았다. 그들은 아들에 버림받았거나 주식과 사업이 몽땅 망했다고 한다.
은퇴 후 10년 쯤 지나 친구들을 만나고 귀가한 아버지께서 요즘 찻값과 음식값은 모조리 당신 몫이라고 껄껄 웃으셨다. 일시불이라는 거금보다 월급처럼 소량을 받되 죽을 때까지 받을 수 있는 연금을 택한 아버지만의 소박한 선택이 당시 흔치 않은 거금을 쥐게 될 상황에서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재 아흔 셋의 연세로 노인 치매병원에 계신 아버지는 지금도 연금을 수령하고 있으며 그래서 자식들 병원비 걱정을 덜어 주고 계시다. 아버지께서 온전했을 때, 우리 가족들이 모여 이렇게 말하며 파안대소한 적이 있다. “연금 부은 30년 넘게 연금을 받고 계신 아버지 때문에 우리나라 공무원 연금 재정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라고.
얼마 전 <어바웃 타임>이란 영화가 있었다. 이는 주인공이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 선택을 바꿔 인생을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흥미로운 설정의 영화였다. 그 신비한 능력은 아버지에서 아들에게로 대물림된다는 데, 아버지는 성인이 된 주인공 아들에게 과거로 돌아가는 요령을 설명해주면서 돈을 버는 일에는 안 썼으면 좋겠다고 말해준다. 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나 여동생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 그 능력을 썼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지나친 흡연으로 폐암에 걸려 시한부 생을 살지만 과거로 돌아가 금연을 선택하여 건강을 되찾으려하지 않고 그냥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난다. 아무리 우리가 과거의 선택을 인위적으로 되돌릴 수 있다 해도 순리를 어겨가면서까지 완벽한 인생을 살 필요는 없다는 메시지가 이 영화에 들어 있다. 사람은 그저 순간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게 인생의 순리고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선택의 기로는 소설의 가장 흔한 주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광복 직후 남북한 이데올로기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 한 젊은 철학도 이야기다. 그는 해방 공간의 남한에 실망한 나머지 월북해서 북한을 체험하지만 역시 낙담한다. 한국전이 발발하자 북한군이 되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다가 국군에게 포로로 잡힌 그는 포로 송환 시 남북한 행 모두를 거부하고 제3국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배에서 몸을 바다로 던져 생을 마감한다. 그는 남도 북도, 그리고 아예 세상도 모두 버리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소설 <광장>은 소련 공산주의가 멸망돼도 여전히 분단의 모순을 안고 있으면서 지금도 종북 여부를 따지는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아직도 음미할 가치가 있는 인생 선택의 고전이다.
동계 올림픽이 끝났다. 김연아 선수는 억울하게 금메달을 놓쳤지만, IOC 선수 위원이 될 수도 있고, 여전히 연예인 뺨치는 인기를 등에 업고 광고를 휩쓸 것이며, 프로 아이스 스케이터가 되어 미쉘콴처럼 화려한 상업 무대를 수놓을 것이다. 그녀의 선택은 앞으로도 죽죽 꽃놀이패다.
전성기 때 세계 선수권 금메달은 물론 세계 신기록도 세웠던 이규혁 선수는 올림픽 메달이 없어 여섯 번이나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마저 메달은 그를 외면했다. 일찌감치 지도자의 길을 마다하고 올림픽 메달을 따기 위해 선수로서 도전을 계속했던 그의 선택이 옳았을까? 도전이라는 그의 선택 자체가 우리에게 인간 승리와 자기 관리의 교훈을 주고 있으니, 그의 선택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이번 동계 올림픽을 통해 러시아 영웅이 된 안현수 선수의 선택에 대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의 러시아 귀화 내막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그의 선택을 쉽게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현재까지 귀화는 그의 인생에 탁월한 선택인 듯하다. 그는 러시아의 국민영웅 칭호에, 훈장에, 호화 아파트에, 코치직 보장에, 푸틴의 애정까지 거머쥐었다. 그러나 한국인은 유난히 귀소본능이 강하다. 지금의 찬란한 귀화를 한국 태생인 그가 나이 들어 호호백발이 돼서 어찌 생각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리라. 그는 신천지를 찾아 이민 떠난 개척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브라질 월드컵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 축구와 관련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 박지성 선수의 대표팀 복귀 거부다. 그는 차범근 감독 이후 축구로 국위를 가장 높게 선양한 국민 축구선수다. 그가 맨유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 대표팀 경기 참가 차 한국과 영국을 오가는 강행군 끝에 그의 무릎에 물이 찼다. 축구팬들은 박지성을 그렇게 혹사시켜가면서까지 월드컵 예선전을 치루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놓아주었고, 박지성 선수는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으며, 그래도 우리 대표팀은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어느덧 그는 전성기가 지나 맨유에서 방출되고 현재는 변방 네덜란드에서 뛰고 있다. 우리 대표팀은 게임을 지휘할 노련한 캡틴이 절실하다. 그런데 그는 홍명보 감독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은퇴를 번복하지 않았다. 대개의 축구팬들은 박지성의 선택을 지지하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서독의 베켄바우어나 영국의 배컴, 프랑스의 지단도 조국의 부름을 받고 늦은 나이에 월드컵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때 그들도 은퇴했다가 복귀했고 팀의 선전에 기여했다. 노장의 연륜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박지성은 벤치를 지키고 있는 한물간 선수가 아니라 아직도 팔팔하게 아인트호벤에서 뛰는 ‘위송 빠레’다. 총력전을 펴도 시원찮은 월드컵 판에, 기량이 녹슬지 않은 그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 주기 위해 대표팀에 합류하지 않겠다니, 그의 선택이 과연 옳을까? 이번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 대표팀이 영 불안하다. 만약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박지성 선수는 그답지 않은 선택에 대해 국민적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 나는 이점을 우려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했듯이, 우리도 인생 고비마다 선택의 기로에 선다. 우리는 하물며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를 고민한다. 고3 수험생들에게 대학교와 학과 선택은 큰 고민거리다. 젊은이들이 친구를 사귀고 배우자를 만나는 일도 향후 인생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직업, 종교, 정치적 이념도 모두 선택의 대상이니, 인생은 곧 선택이다.
선택의 기준은 정도(正道)에 있다. 보통 사람이든,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운동선수든, 소설이나 영화 속의 주인공이든, 우리는 그들의 선택을 그들이 정도를 걸었는가에 두고 평가해야 한다. 혹 자신의 선택의 결과가 나쁘더라도 그 선택이 바른 도리에 근거했다면, 우리는 그 선택을 후회하거나 변명할 필요가 없다. 당당히 책임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또 다른 잘못된 선택으로 막으려는 불쌍한 중생들을 많이 본다. 그런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 뿌연 미세먼지를 촉촉이 씻겨주는 비 오는 날에, 그렇게 살지는 말아야겠다는 선택지(選擇肢)를 하루 종일 만지작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