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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피해자에 대한 배상 요구는 인간 회복 위한 기나긴 싸움" / 조윤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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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피해자에 대한 배상 요구는 인간 회복 위한 기나긴 싸움" / 조윤화 기자
  • 취재기자 조윤화
  • 승인 2017.12.22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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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로 부산위안부역사관 운영하며 위안부 인권운동 펼치는 김문숙 회장 인터뷰
부산 수영구 수영동 451-12번지 수영역 2번 출구에서 10분가량 걷다 보면, 언뜻 보기에도 오래돼 보이는 3층 상가 건물이 나온다. 이곳 2층에 ‘민족과 여성 역사관’이 있다. 이곳은 관장 김문숙(89) 회장이 일제의 잔학 행위를 널리 알리고 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 사비로 운영하고 있는 부산 유일의 위안부 역사관이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양 옆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술 치료를 받으며 그렸던 그림들과 위안부 관련 기사들이 액자에 담겨 전시돼 있다. 2층에 올라 역사관에 들어서니, 김문숙 회장이 기자를 환하게 반긴다. 첫 만남임에도 김 회장은 손녀 딸 대하듯 기자의 손을 잡고 역사관 내부를 둘러보며 세세히 설명해주었다. 역사관을 다 둘러본 뒤,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먼저 그에게 위안부 문제에 뛰어들게 된 계기를 물었다.
부산 위안부 역사관 회장 김문숙 씨(사진: 취재기자 조윤화).

위안부,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다

1927년에 태어나 19세 때 광복을 맞이한 김문숙 회장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위안부’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녀가 ‘위안부’ 문제를 인식하게 된 시기는 대학 졸업 후 여성운동을 하면서부터다. 김 회장은 대학교를 졸업한 직후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글자를 모르는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여성 계몽 운동을 했다. “당시는 남자 위주의 봉건적 사회여서 여자가 공부하면 건방져진다고 조선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여자는 글자도 안 가르치고 학교도 안 보냈어요.” 이 사실이 안타까웠던 김 회장은 여성들에게 글자를 열심히 가르침과 동시에 남녀평등에 대해서도 같이 가르쳤다. 한창 여성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 김 회장의 귀에 위안부 문제가 난데없이 들리기 시작한다. 1990년,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 소위 ‘양갈보’의 존재가 일본에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일본인들이 기생 관광을 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낮에 멀쩡한 (한국) 처녀들이 일본인 뒤를 따라 호텔로 쫄쫄 들어가는 거라.” 당시 김 회장의 여성운동본부가 부산호텔 앞에 위치해 있었고, 기생 관광의 현장을 도저히 눈으로 두고 볼 수 없었던 김문숙 회장은 공항에서 기생 관광을 목적으로 한 일본인 입국 금지 시위를 했다. 시위를 지켜보던 일본인은 “옛날에 조선의 처녀들이 중국에 몸 팔러 갔을 땐 우리가 돈이 없어서 못 줬지만, 지금은 돈도 주겠다는데 왜 못하게 하냐”고 김 회장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에 김회장은 왜 한국 처녀들이 중국에 갔을까 의문을 가졌고, 이 날 이후로 자세히 알아보니 일제강점기 당시 공장에서 일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주겠다는 일본의 속임수에 넘어가 많은 한국 여성들이 중국, 대만, 동남아 등지로 가게 됐고, 그 과정에서 강제노역과 강간을 비롯한 여러 성범죄가 일어났음을 알게 됐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김 회장은 위안부 피해자를 우선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정신대 신고 전화’를 설치하여 이른바 ‘위안부 핫라인’을 구축했다. ‘위안부 핫라인’은 하루 평균 240통의 전화가 올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전화를 개통한 그 해 신고한 위안부 피해자 숫자는 250명이었지만 현재 생존한 분은 33명 뿐이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최초로 잘못을 시인한 시모노세키 재판

일제강점기 당시 대부분의 남자들이 전쟁에 동원됐다. 공장에서 일할 노동력이 절실했던 일본은 한국의 12~13세 정도의 여자아이들을 데려가 강제로 일을 시켰다. 월급은 한국으로 돌아갈 때 한꺼번에 지급하기로 했으나, 결국 그녀들은 월급을 받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공장의 관계자들이 전부 도망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가 없는 고된 노동을 견뎌야 했던 이들이 바로 ‘근로정신대’다.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위안부 핫라인’을 통해 못 받은 월급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도움을 요청했고, 이들의 사연을 들은 김 회장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한다.
김문숙 회장이 ‘시모노세키 재판’의 내용을 다룬 일본 신문을 소개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조윤화).
1992년 12월 25일, 김문숙 회장은 한순녀, 박두리(위안부), 유찬이, 박소덕(근로정신대) 등 총 4명을 이끌고 가서 시모노세끼 지방법원에 ‘부산 종군위안부·근로정신대 공식 사죄 등 청구사건’이란 이름의 소장을 제출했다. 당시 김 회장은 피해자들의 증언만으로 시작한 재판에서 승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도 알았지만 피해자들의 절규를 외면할 순 없었다고 한다. 시모노세키 재판을 돌이켜 김 회장은 ‘길고도 외로운 인간 회복 싸움’의 과정이라 말했다. 그럼에도 재판 과정에서 김 회장에게 희망이 되어 준 존재가 있었다. 바로 김 회장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의 도움이었다. 시모노세키 재판을 하는 동안, 교포 2세 변호사를 포함한 11명의 일본인 변호사들은 무보수로 변론을 맡아주었고, 후쿠오카에서 구성된 후원회에서는 위안부,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을 오갈 때마다 숙소를 마련해 주었고, 재판장까지 편히 갈 수 있도록 버스 대절을 해주었다. 6년 동안 이어진 길고도 치열한 재판 과정 끝에, 1998년 4월 일본재판부는 ‘일본 국회의원들은 종군위안부가 겪은 고통에 대한 피해 회복 조치의 의무가 있으며 위안부 여성에게 위자료 30만 엔씩을 지불해야한다’고 판결한다. 시모노세키 재판은 위안부, 근로정신대 피해자가 최초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했다는 것과 일본 정부가 현재까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잘못을 인정한 재판이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김문숙 회장은 시모노세키 재판 전까지만 해도 위안부, 근로정신대 피해 여성들이 일본에게 배상을 요구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했었는데 , ‘일본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이 남으로써 피해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좀 더 당당하게 내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학교를 다닐 당시 일본어로 수업을 듣고 언제나 일본어를 써야만 했다던 김문숙 회장은 학교를 졸업한 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녀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은 언제라도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증언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다. 일생을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한 그녀에게 물어 봤다. "일본이 자신의 문제를 완전히 인정하고, 진정으로 사과하는 날이 올까요?’" 김 회장은 "그런 날이 와야만 하는데, 현재 아베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정치 상황을 보면 우익세력들 때문에 어려울 것 같다"고 답했다. "어렵고 험난한 길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쌍한 그네들(위안부)을 버릴 수 없어 그네들의 영혼의 조각이라도 거두어야겠기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는 김 회장. ‘부산위안부역사관’에서 위안부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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