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로 부산위안부역사관 운영하며 위안부 인권운동 펼치는 김문숙 회장 인터뷰
부산 수영구 수영동 451-12번지 수영역 2번 출구에서 10분가량 걷다 보면, 언뜻 보기에도 오래돼 보이는 3층 상가 건물이 나온다. 이곳 2층에 ‘민족과 여성 역사관’이 있다. 이곳은 관장 김문숙(89) 회장이 일제의 잔학 행위를 널리 알리고 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 사비로 운영하고 있는 부산 유일의 위안부 역사관이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양 옆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술 치료를 받으며 그렸던 그림들과 위안부 관련 기사들이 액자에 담겨 전시돼 있다.
2층에 올라 역사관에 들어서니, 김문숙 회장이 기자를 환하게 반긴다. 첫 만남임에도 김 회장은 손녀 딸 대하듯 기자의 손을 잡고 역사관 내부를 둘러보며 세세히 설명해주었다. 역사관을 다 둘러본 뒤,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먼저 그에게 위안부 문제에 뛰어들게 된 계기를 물었다.
위안부,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다
1927년에 태어나 19세 때 광복을 맞이한 김문숙 회장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위안부’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녀가 ‘위안부’ 문제를 인식하게 된 시기는 대학 졸업 후 여성운동을 하면서부터다. 김 회장은 대학교를 졸업한 직후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글자를 모르는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여성 계몽 운동을 했다. “당시는 남자 위주의 봉건적 사회여서 여자가 공부하면 건방져진다고 조선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여자는 글자도 안 가르치고 학교도 안 보냈어요.” 이 사실이 안타까웠던 김 회장은 여성들에게 글자를 열심히 가르침과 동시에 남녀평등에 대해서도 같이 가르쳤다. 한창 여성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 김 회장의 귀에 위안부 문제가 난데없이 들리기 시작한다. 1990년,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 소위 ‘양갈보’의 존재가 일본에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일본인들이 기생 관광을 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낮에 멀쩡한 (한국) 처녀들이 일본인 뒤를 따라 호텔로 쫄쫄 들어가는 거라.” 당시 김 회장의 여성운동본부가 부산호텔 앞에 위치해 있었고, 기생 관광의 현장을 도저히 눈으로 두고 볼 수 없었던 김문숙 회장은 공항에서 기생 관광을 목적으로 한 일본인 입국 금지 시위를 했다. 시위를 지켜보던 일본인은 “옛날에 조선의 처녀들이 중국에 몸 팔러 갔을 땐 우리가 돈이 없어서 못 줬지만, 지금은 돈도 주겠다는데 왜 못하게 하냐”고 김 회장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에 김회장은 왜 한국 처녀들이 중국에 갔을까 의문을 가졌고, 이 날 이후로 자세히 알아보니 일제강점기 당시 공장에서 일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주겠다는 일본의 속임수에 넘어가 많은 한국 여성들이 중국, 대만, 동남아 등지로 가게 됐고, 그 과정에서 강제노역과 강간을 비롯한 여러 성범죄가 일어났음을 알게 됐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김 회장은 위안부 피해자를 우선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정신대 신고 전화’를 설치하여 이른바 ‘위안부 핫라인’을 구축했다. ‘위안부 핫라인’은 하루 평균 240통의 전화가 올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전화를 개통한 그 해 신고한 위안부 피해자 숫자는 250명이었지만 현재 생존한 분은 33명 뿐이다.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최초로 잘못을 시인한 시모노세키 재판
일제강점기 당시 대부분의 남자들이 전쟁에 동원됐다. 공장에서 일할 노동력이 절실했던 일본은 한국의 12~13세 정도의 여자아이들을 데려가 강제로 일을 시켰다. 월급은 한국으로 돌아갈 때 한꺼번에 지급하기로 했으나, 결국 그녀들은 월급을 받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공장의 관계자들이 전부 도망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가 없는 고된 노동을 견뎌야 했던 이들이 바로 ‘근로정신대’다.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위안부 핫라인’을 통해 못 받은 월급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도움을 요청했고, 이들의 사연을 들은 김 회장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한다.저작권자 © CIVICNEWS(시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