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알쓸신잡2>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홍익대 유현준 교수의 저서인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도시의 거리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왜 서울 강남 거리는 걷기가 싫고 명동 거리는 걷고 싶은 걸까? 이것을 이벤트의 밀도라는 개념으로 유 교수는 설명하고 있는데, 이벤트 밀도가 높은 거리는 보행자에게 변화의 체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점포의 출입구가 자주 나타난다는 것은 조금만 걸어도 새로운 점포의 쇼윈도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보행자가 쇼윈도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계속 접하게 되면서 걸음도 느려지고, 새로운 경험을 획득하게 된다고 유 교수는 설명한다.
또한, 강남의 거리가 높은 고층건물들로 이어져 있다보니 보행자의 시선을 잡아주지 못하고, 쌩쌩거리며 달리는 차량의 틈에서 보행로는 그저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도 한다. 명동처럼 거리에 각종 쇼윈도와 노점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거리는 경험의 밀도가 높고, 보행자가 다시 방문하더라도 다른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벤트의 밀도가 높다는 것이다. 유현준 교수는 높은 이벤트 밀도의 거리는 보행자에게 권력이 이양되었다고 표현한다. 즉 공간의 주도권을 보행자가 갖게 되고, 자신만의 세상을 구성해 나가면서 걷게 된다는 것이다.
고층 건물과 아파트가 나열된 거리는 걷는 사람보다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자동차만이 거리의 주인공인 것처럼 보인다. 삿포로는 도심이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구획되어 있어서 도로 자체가 이벤트 요소를 지니지는 않는다. 자칫 거리 모습이 똑같아 보여서 지루해질 염려가 있는 바둑판 모양의 거리는 예상 외로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부분의 건물은 1층에 상가를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소위 이벤트 밀도가 높다. 고층 건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어디서나 선명한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특히 삿포로는 유럽의 트램같은 노면전차를 운영한다. 트램은 교통수단으로서도 톡톡히 한몫하고 있지만 보행자들에겐 재미있는 풍경으로 다가온다. 느릿하게 천천히 달리는 노면전차 뿐만 아니라 도심 내 차량들의 속도 역시 급하지 않다. 삿포로는 날씨 좋은 주말이면 거리 곳곳이 공연장이나 전시장으로 변한다. 일부 구간은 차량 진입이 통제되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군데군데 둘러모여 문화행사를 즐긴다. 보행자들에게 이벤트 밀도를 극대화시키는 시도인 셈이다.
2km넘게 이어지는 삿포로의 지하도 역시 이벤트 밀도가 높다. 지하도 양쪽은 각종 숍과 카페,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미술전시와 공연, 각종 발표회가 열리기도 한다. 긴 지하도를 그냥 걷기만 해도 전시회와 공연은 덤으로 즐길 수 있다.
걷기 좋은 도시에 시민들이 모여들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삿포로 시를 완벽한 보행자의 도시로 만든 건 문화예술이 그 속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성장과 속도에 그 자리를 내준 우리 도시의 거리 곳곳에 사람이 걷다가 멈추고 함께 어우러지며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문화의 향기를 곁들여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