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메시지’고 누가 ‘메신저’인가?...비트코인 가상화폐 거래 금지 법무부 장관 발언과 청와대의 번복
발행인 정태철
승인 2018.01.12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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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인 정태철
영화 <내부자>에서 신문사 주필이 비난 여론을 걱정하는 재벌 회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금 기다려 보시지요, 회장님...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입니다. 거 뭐 하러 개, 돼지들에게 신경을 쓰고 그러십니까? (대중들은)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여기서 신문사 주필은 대중들이 언론 보도 하나에 들고 일어났다가도 언론이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면 역시 손쉽게 이끌려 간다는 언론의 자만심을 음흉하게 자랑하고 있다. 이렇게 국민들에게 생각할 거리와 여론의 방향을 제공하는 언론의 기능을 ‘어젠다 세팅(agenda setting) 기능’, 즉 ‘의제(議題) 설정 기능’이라고 한다. 이 말은 현재 우리 사회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의제, 안건, 논의의 대상)를 언론이 국민들 머릿속에 심어준다는 뜻으로, 원래는 학문 용어였지만 지금은 일반인들도 일상 대화에서 많이 쓸 정도로 보편화됐다.
최근에는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가 국민들에게 이 순간 핫한 이슈(의제)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일부 SNS에서 비롯된 이슈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실시간 검색어도 언론의 뉴스나 다른 콘텐츠로부터 대부분 촉발된 것이므로, 역시 언론은 아직도 국민의 뇌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때 언론학계에서는 언론이 국민들의 의제를 설정해 준다면, 그 이전에 언론에게 의제를 심어주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며, 그가 국민 여론 설정의 '진정한 어젠다 세터'가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언론이 국민의 여론을 반영했다면, 국민 여론이 언론의 어젠다 세터가 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많지 않다. 일반 국민이 특정 사안에 대해 여론을 선도할 만큼 정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 뒤의 의제 설정자가 언론사 사주나 간부 등 소위 언론사 내부의 의사결정자, 즉 ‘게이트키퍼(gatekeeper)’일 수도 있다. 아마 이게 통상적일 듯하다. 그러나 광고주, 독재자, 정치인의 멘토, 혹은 그 누구인지도 모르는 ‘히든 어젠다 세터’가 언론과 그리고 언론과 연계된 정부를 주무른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실세가 언론이나 정부 말고 따로 있다는 것은 조지 오웰의 <1984> 속 ‘빅 브라더’를 연상케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항간에 떠돌던 홍삼트리오, 만사형통, 6인회, 기춘대군, 8선녀, 원탁회의 이런 것들은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숨은 어젠다 세터를 찾으려는 일반 시민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루머들이다.
한 나라 권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의사결정자나 어젠다 세터, 즉 정책의 방향과 요체를 생산하는 사람인 ‘메시지’와, 그 정책의 방향과 요체를 국민에게 전달하고 집행하는 사람인 ‘메신저’로 구분돼서 움직인다.
그렇다면, 조선의 임금들은 메시지였고, 신하들은 왕명을 받들어 백성에게 전달하는 메신저였을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 만은 않았다고 한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은 드라마 <정도전>에서 자신이 꿈꾸는 나라는 '왕의 나라'가 아니라 '신하의 나라'라고 했다. 그는 태조에게 “신하의 소임은 간쟁하는 것입니다. 시끄러운 것이 당연합니다...공론은 나라의 원기와도 같은 것이니 나랏일로 궐 안팎이 떠들썩한 것은 그만큼 이 나라가 건강하다는 증좌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주위 신하들에게는 “군왕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자는 밥버러지일 뿐 제대로 된 신하라 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는 우리 역사에서 중국의 황제처럼 전제 권력을 행사한 왕이 많지 않았다고 했다. 자기 맘대로 왕권을 행사했다가는 연산군처럼 폭군으로 평가되어 쫓겨났던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신하의 왕권에 대한 견제가 중국보다 강했기 때문이라고 송 교수는 설명했다. 청나라 강희제는 조선 사신에게 “조선은 왕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대개 역사학자들은 신하들보다 똑똑했던 세종과 정조를 제외하고 조선 국왕들의 국정 장악력이 생각보다 약했다고 한다. 그리고 왕의 잘못된 시책에 신하들이 수시로 간쟁, 상소를 했으며, 심지어는 국정을 보이콧하고 조기 퇴청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한명회는 세조의 장자방으로 계유정란 1등 공신이었으며 두 딸을 왕비로 시집보냈다. 그 덕에 그는 세조, 예종, 성종 3대에 걸쳐 영의정이었고, 특히 성종 때는 어린 왕을 대신해서 결재까지 대행할 정도로 막강 권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한명회는 메시지, 당시 왕들은 메신저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강력한 리더였고, 메시지였으며, 관료들은 충실한 메신저였다. 그 결과가 고도 경제 성장이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전두환 대통령은 경제 정책에 관하여 경제수석이던 김재익(아웅산 테러로 순직)을 신임해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라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경제 정책에서 김재익은 메시지, 전두환은 메신저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박학다식해서 많은 사안에서 장관이나 비서들을 압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도 두 말할 필요 없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힘 있는 연설을 들으면, 그분이야말로 메신저가 아니라 신념에 찬 메시지였음이 느껴진다.
박근혜 대통령은 형편없는 메신저 신세였다. 박 대통령은 재임 시절 날마다 관저로 일찍 퇴근해서 누구를 만나서 무슨 조언을 듣기에, 그 다음날 대통령 연설문이 수정되고 중요한 지시가 대통령으로부터 새로 나오는지에 대해, 비서실도, 행정부도, 언론도 갸우뚱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메시지는 최순실이었고, 최순실 국정 농단은 바로 대통령을 메신저로 이용한, 최순실이란 메시지의 무모한 장난이었다.
연예 예능 분야에서는 기획사 대표, 방송국 PD, 기자들이 메시지다. 이들이 곧 문화 산업계의 ‘문화 대통령’이다. 아이돌 스타 등 연예인은 대부분 그 메시지의 연출에 의해 문화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메신저에 불과하다. 이번 미국의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선사한 메릴 스트립이나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들이 연예인이지만 메신저가 아니라 당당한 문화계 메시지임을 과시했다. 윈프리는 그날 연설 이후 일약 트럼프의 민주당 대항마 대통령 후보로 부상할 정도로 미국의 정치계 메시지가 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에 대해서 말이 많았다. 문정인 특보 말대로 정책이 시행될 때마다, 보수 언론들은 외교안보 분야에서 그가 메시지이고 정부가 메신저라는 취지로 비판하곤 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 대해서는 장관이 보이지 않는다고 언론들이 지적했다. 이 분야 메시지는 청와대이고, 강 장관은 메신저가 아니냐는 의미였다. 북핵 정책이나 위안부 한일 협약 건도 청와대가 메시지였고, 강 장관이 이를 미국과 일본에 전달하고 외교 관계를 조율하는 메신저가 아니냐는 견해가 뉴스화되곤 했다.
비트코인의 투기 난맥 상에 대해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가상화폐 거래 금지 법안을 준비 중이고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를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으나, 이는 몇 시간 뒤 청와대 국민 청원과 청와대의 번복 발표로 미결 사항이 되고 말았다. 만약 청와대가 법무부 장관의 발표 내용을 수정하고 싶었다면, 다시 해당 장관의 입으로 그 사실을 국민들에게 전했어야 했다. 결국 법무부 장관은 메신저고 청와대가 메시지라는 사실을 국민에게 실토한 셈이 됐다.
원래 비서실(祕書실)은 ‘비밀(祕密)스럽게 보조하는 곳’이다. 영어로도 비서를 뜻하는 ‘세크리터리(secretary)’는 ‘비밀(secret)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래서 비서는 없는 듯 안 보이게 운신하는 게 좋다. 정부 행정의 중심은 행정부다. 이게 청와대 비서들 중심이 되면 이를 ‘비서 정치’라고 한다. 원래 비서 정치는 고대의 환관 정치와 비견되는 것으로 행정부를 무력화시킨다. 따라서 비서들이 메시지가 되고 행정부가 메신저가 되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전직 대통령이 공조직인 행정부를 놔두고 비서 정치보다 더 은밀한 비선 조직에 의존해서 국정을 운영한 비참한 선례를 목격했다. 박 전 대통령이 메신저였고 최순실이 메시지인 줄은 그 누구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 역사적인 교훈을 얻은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 정부에서도 메시지는 따로 있고 누구는 메신저에 불과하다는 여론이 커진다면, 어느 국민인들 마음이 편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