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임산부 오진아(33, 부산시 동래구) 씨는 매일 지하철을 탈 때마다 긴장한다. 임산부 배려석이 마련돼 있지만,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오 씨가 더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오 씨는 “임산부지만 임산부석에 앉기 어렵다. 임산부 배지를 보고도 승객들이 못 본 척하기도 한다”고 호소했다.
임산부 배려석은 임산부를 배려하기 위해 만든 좌석이지만, 정작 임산부 10명 중 8명은 임산부석 이용에 불편을 느낀 것으로 조사됐다.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지난해 1월부터 8월까지 임산부 총 4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중교통 임산부석 이용에 불편을 느꼈다’는 응답이 88.5%였다. 그 이유 중 ‘일반인이 착석 후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서’가 58.6%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어 ‘임산부석 개수가 부족해서’가 15.5%로 뒤를 이었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임산부 배려석’ 관련 민원건수는 2만7589건에 달했다.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하루 평균 80건 넘는 임산부 배려석 관련 민원이 들어온 셈이다. 임산부석에 앉아 정작 임산부에게 자리를 비켜주지 않거나 임산부석을 훼손하는 등 임산부들은 다양한 유형으로 불편을 겪고 있다.
임산부·여성 혐오로 이어진 임산부석 훼손
지난 2월 서울지하철 4호선에서 전동차 열 칸 가운데 일곱 개 칸의 임산부 배려석이 낙서로 훼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낙서는 굵은 펜으로 임산부석 그림에 X자를 그어놓았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임산부석이나 노약자석에 낙서가 발견되는 일은 빈번하다. 이에 누리꾼들은 ‘임산부에 대한 혐오’라고 지적했다.
눈치만 힐끔힐끔... 임산부석에 앉은 채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사람들
임신 18주 차 A(33) 씨는 보건소에서 임산부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임산부 배지’를 가방에 차고 다닌다. 하지만 A 씨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기는 쉽지 않다. A 씨는 “몇몇 사람들이 임산부석에 앉아 핸드폰을 보기 때문에 내 가방의 임산부 배지를 잘 못 본다. 심지어 보더라도 눈치만 보고 그냥 계속 앉아 있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A 씨는 “승객들이 ‘임산부석’에 앉아 있더라도 주위를 틈틈이 둘러봤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온라인 커뮤니티 속 임산부석 인증 등 임산부 조롱
일간베스트, 보배드림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성차별적 혐오 글과 댓글이 수없이 많이 떠돌고 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남성 혐오’, ‘여성 혐오’가 퍼지며 ‘임산부 배려석’이 양극의 갈등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일간베스트에서는 남성들이 일부러 임산부석에 앉아 인증하는 ‘임산부석 인증 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리 안 비켜줄 거다", ‘"임산부에게 비켜주라고 했는데 무시했다", "XX XX들만 앉을 수 있는 좌석" 등 임산부를 조롱하거나 성희롱하는 글도 많아 문제가 되고 있다.
티는 잘 안 나지만, 똑같이 고통스러운 초기 임산부
초기 임산부도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아주 조심해야 하는 시기다. 또 임신 초기의 여성은 호르몬 변화가 시작되면 쉽게 피곤해지고, 어지럼증을 느끼기도 한다. 호르몬 변화 때문에 흔히 말하는 ‘입덧’이 시작된다. 아기의 집을 만들기 위해 서서히 자궁이 커지기 때문에 척추와 골반이 눌려 고통받기도 한다.
임신 12주 차인 안모(32, 서울시 양평구) 씨도 출퇴근하는 지하철에서 매번 수난을 겪는다. 유난히 많은 사람 때문에 ‘지옥철’이라고도 불리는 서울의 출퇴근 길 지하철 내부는 임산부에게 유독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안 씨는 임신 초기로 배가 나오지 않아 겉보기로는 임산부인지 알 수가 없다. 안 씨는 “출퇴근길 서울 지하철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가방에 매단 임산부 배지도 전혀 소용이 없다. 임산부석에 다가가기도 힘들 뿐더러 사람들 속에서 임산부 배지를 번쩍 들기도 애매하다”며 임산부 배지의 한계를 지적했다.
각박한 서울 지하철 속에서 임산부에게도 때때로 따뜻한 일은 생긴다. 얼마 전 임신 초기의 안 씨는 갑갑한 지하철 내에서 어지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임산부석에 사람이 앉아 있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옆자리의 한 여성이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사람에게 임산부 배지를 가리키며 "우리 며느리도 임산부인데, 저 배지를 달고 다닌다. 이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임산부가 오면 꼭 비켜줘야 한다"며 안 씨에게 자리를 마련해줬다. 안 씨는 "임산부라도 왠지 눈치가 보여 선뜻 말하지 못하는데, 먼저 배려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실천하는 배려’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동식 센터장은 지난해 12월 인구보건복지협회 주최로 열린 ‘임신 경험으로 본 배려문화와 지원정책’ 토론회에서 "배려는 인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실천이 동반되어야 (상대방에게) 배려가 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를 위한 지속적인 캠페인과 교육을 통해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고, 곧 실천으로 이어지도록 더욱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