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토이자러스(Toys R Us)’란 대형 장난감 백화점이 있다. 나도 연구년으로 미국에 있을 때 내 아이들을 데리고 두어 번 가 본 적이 있다. 그곳엔 세상의 온갖 장난감이 다 모여 있어 아이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최근 토이자러스 백화점이 법원에 파산 신청했다고 한다. 파산 이유는 요즘 아이들이 인형이나 레고 등 손으로 만지고 노는 장난감을 떠나 스마트폰 게임과 유튜브에 빠져 놀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의 한 언론은 이를 보고 “토이자러스가 스마트폰에 살해당했다”고 했다고 한다.
최근 외지 출장 중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데, 내 옆 테이블에서 서너 살 정도의 꼬마를 옆에 앉히고 젊은 부부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모의 식사를 꼬마가 전혀 방해하지 않는 이유는 그 아이가 거치대에 세워놓은 스마트폰으로 만화영화를 ‘진지하게’ 시청 중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말도 잘 못할 것 같은 그 아이는 능숙한 솜씨로 스마트폰을 터치하고 작동하고 있어서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스마트폰의 위세는 미디어 이용 실태 조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2014년 우리 국민의 스마트폰 1일 평균 이용 시간은 1시간 17분이었다. 신문, TV 등 다른 매체의 이용 시간은 줄고 있는데, 오로지 스마트폰 이용 시간만이 늘고 있었다. 구글이 세계 56개국 40여 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컨슈머 바로미터’에 따르면, 우리나라 스마트폰 이용자의 88%가 휴대전화로 매일 정보를 검색한다고 하며, 이는 세계 1위였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개막했다. 작년 정치적 문제로 잠시 주춤했던 부국제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다시 성황을 이루고 있다. 한국 영화의 성장은 각종 통계 수치로 그 화려한 위상을 증명한다. 통계에 따르면, 영화 산업 매출은 2015년 2조 원을 처음으로 돌파했고, 2016년은 2조 2730만 원을 기록해서 2015년 대비 7.6% 성장했다.
또한 한국은 세계적으로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국가 중 하나다. 글로벌 산업정보회사인 IHS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6년 우리나라의 1인당 연평균 영화 관람 횟수는 4.2회이며, 이는 4.22회를 기록한 아이슬란드에 이어 세계 2위다. 싱가폴이 3.93회, 호주가 3.65회, 미국이 3.64회로 그 뒤를 잇고 있다. 2013년 영국 미디어 리서치 업체 조사 결과에서는 한국의 1인당 연간 평균 영화 관람 횟수가 4.12편으로 2위인 미국 3.88편을 누르고 세계 1위에 등극한 적도 있다. 한국인의 영화 사랑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부국제가 전 국민을 부산으로 부르는 건 당연하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 전체가 스마트폰, 영화, 인터넷, TV, IPTV 등의 영상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이런 국민적 ‘디지털 엑소더스’ 현상 때문에 줄고 있는 통계도 있다. 바로 독서다. 통계청의 독서 인구(13세 이상 인구 중 1년에 책을 한 권이라도 읽은 인구) 조사 결과, 2009년 대상 인구의 62.1%이던 독서 인구가 2011년에는 61.8%, 그리고 2015년에는 56.2%로 감소했다. 2004년 국민 1인당 연평균 독서 권수는 13.9권, 2009년은 10.9권, 2015년은 9.3권이다. 이제는 한 달에 한 권 꼴도 안된다. 2004년 미국 국민은 한 달에 6.6권을 읽었고, 일본인은 6.1권, 프랑스인은 5.9권, 중국인은 2.6권을 각각 읽은 반면, 한국은 겨우 한 달에 1.3권을 읽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국제연합 회원국 192개국 중 166위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책은 안 읽고 TV나 스마트폰의 영화, 영상을 더 많이 이용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 결정론’이 생각의 단초를 제공한다.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했다. 미디어는 전달하는 기계이고, 메시지는 미디어란 기계에 담긴 내용이다. 그런데 미디어가 메시지란 말은 어떤 미디어로 전달하느냐에 따라서 메시지가 달라진다는 의미다. 결국, 핵심은 같은 메시지라도 미디어가 달라지면 사람에게 다른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주 쓰는 미디어가 달라지면 그 안의 메시지도 달라지므로 결과적으로 사람이 달라진다는 거다. 뉴스를 종이 미디어로 보다가 스마트폰 미디어로 바꾸면 사람의 무언가가 바뀔 수 있다는 게 바로 맥루한의 미디어 결정론이다(본지 ‘인공지능, 그것은 금지되어 있느니라...’, 2016년 3월 11일자 참조).
그럼 가지고 노는 장난감도 바뀌고 접하는 미디어가 달라지면, 사람은 어떻게 달라질까? 그 말을 하기는 쉽지 않다. 원래 사람의 인성이 주변 환경이 만든 것이냐, 사람 자체의 의지가 만든 것이냐 하는 교육학적 관점의 논쟁이 있다. 문제 가정에 문제아가 나온다는 것은 환경결정론적 관점이고, 문제 가정의 아이라도 그 아이의 의지에 따라서 문제아가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주의론(意见論)적 관점이다. 실상은 부모의 사회적 지위를 뛰어 넘어 ‘개천에서 용 나는 사례’도 있고, 문제 가정이라는 환경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폭력에 휩쓸리는 최근의 문제 가정 출신 문제아 사례도 있다.
그런데 미국의 고고학자 이안 모리스의 저서 <가치관의 탄생>은 미디어라는 환경이 바뀔 때 사람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모리스는 가치관은 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사람이 생각을 바꿔 환경에 적응한 결과라고 했다. 그는 수렵채집 시대, 농경시대, 그리고 산업시대(화석연료시대)라는 에너지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사람들의 가치관도 따라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모리스의 이런 견해는 환경결정론적이고 진화론적이다. 따라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주범은 엽기적인 가치관이며, 엽기적인 가치관은 엽기적인 사회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경쟁이 심하고 거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여기에 적합한 가치관을 갖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 동물이 그 사회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유전형질을 찾아내는 것처럼(다윈은 이를 ‘자연선택’이라 했음), 사람도 환경이 바뀌면 새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가치관을 찾는다는 의미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사회가 거칠어지므로, 이런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 우리는 이기적이고, 적대적이며, 폭력적이고, 쟁탈적인 인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거친 사회에서 거친 가치관의 유전형질이 굳어지기 전에 더 귀중한 가치관이 있다는 대안을 제공하는 수단이 바로 독서다. 그래서 멀어진 책을 우리 가까이로 불러와야 한다. 인성 정화에는 100년도 더 걸린다. 책은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상상력, 창의력, 꿈의 원천이다.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국민이 미국과 일본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반면에, 우리의 고속 경제 성장이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진짜 이유는 그렇게 책을 안 읽고도 세계 경제 대국이 되었다는 ‘비아냥성 조크’ 내지는 '미스터리'일 수도 있다.
동양사상가 조용헌 씨는 ‘관상불여서상(觀相远不如書相)’이라고 했다. 얼굴보다는 그 집의 책 모양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 집에 어떤 책이 꽂혀 있느냐가 그 집의 진정한 풍모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괴테는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이 너를 말해준다”고 했다. 각자 자기 집에 서가는 있는지, 서가가 있다면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살펴보자. 부모가 책을 읽어야 자식도 책을 읽는다. 누구나 지금 현재 읽고 있는 책이 있어야 한다. 바빠서 하루에 한 쪽을 못 읽고, 한 권 읽는 데 몇 달이 걸린다고 해도, 누구나 현재 읽고 있는 책이 한 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길가다가도 읽고 싶은 책이 떠오르면 그 즉시 사는 게 좋다. 사 놓으면 언젠가는 읽는다. 나는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입대 전 몇 개월을 휴학하면서 알바로 번 돈으로 1977년에 삼성(三省)출판사의 ‘세계사상전집’ 50권을 샀다. 플라톤, 헤겔, 칸트 등 온갖 사상의 고전들이 그득했다. 그러나 군대, 대학원, 유학을 거치면서 전공책을 주로 읽다보니, 그 전집 중 열 권도 채 못 읽고 40년을 고향집 서가에 방치하다가, 최근 이 책을 부산으로 옮겨와 열심히 읽고 있다. 이 책들은 세로쓰기에 곰팡이 냄새를 풀풀 풍기지만 불후(不朽)의 사상서임을 절감하고 있다. 역시 사 놓으면 언젠가는 읽게 마련이다.
독서를 권장하는 경구는 셀 수 없이 많다. 두보의 한시에 나오는 “남아수독오거서(南兒須讀五車書: 사람은 모름지기 평생 읽은 책이 다섯 수레는 되어야 한다)”라는 말도 있고, 안중근 의사는 “하루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서 가시가 돋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고의 독서 장려 교훈은 김정태의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는 책에 쓰여 있다. “(단군신화에서 호랑이가 100일도 되기 전에 참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나간 것을 보고)...만약 쑥과 마늘을 먹을 때마다 하루하루 몸의 일부분이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면, 호랑이도 꾹 참았을 것이다. 책 읽기는 쑥과 마늘과 같다. 책이라는 게 오늘 한 권 읽고, 일주일에 몇 권을 읽어도 도통 느껴지는 변화가 없다. 그런데 100일 때 곰이 사람으로 변했던 것처럼 책 읽기가 쌓이는 어느 ‘100일’이 되었을 때, ‘책 읽은 사람’과 ‘책 읽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한다(본지 ‘대학의 위기와 책 이야기’, 2014년 4월 11일자에서 재인용).”
우리나라에 ‘천만 영화’는 흔해 빠져도 <해리포터> 같은 ‘천만 베스트셀러’는 왜 없을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을 보고 있자니, 우리 사회가 '독서빈곤국'이라는 대놓고 '말 못할 고충'이 괜시리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