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정인
부산 사하구에 있는 감천문화마을은 성공한 관광지다. 직년 한 해만 257만 명이 다녀갔다.
내가 그곳에 처음 가본 것은 아직 유명해지기 전인 2007년 어느 봄날이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스님이 그 동네 절에 주지 소임을 맡아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그때까지 감천동은 이름만 들었을 뿐이었다.
사전 지식 없이 찾아간 감천마을의 첫 인상은 강렬했다. 산비탈에 알록달록하게 색칠한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모습이 그랬다. 마을 초입을 지나자 나타난 좁은 골목은 내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만큼 고요했다. 굽고 바닥이 울퉁불퉁한 골목에는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선지 어느 집 앞 커다란 플라스틱 버킷에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상추가 퍽 어여쁘게 보였다.
골목은 두 사람이 겨우 비켜 갈 만한 폭이었다. 그마저 비뚤배뚤 휘어진 채 미로처럼 이어져 있어 끝을 알 수 없었다. 집들은 계단을 이룬 채 빼곡하게 앉아 있어서 경계가 불분명했다. 어디가 대문이고 어디가 창문인지 나로선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정도였다. 참으로 특이한 모습을 가진 동네였다. 그 바람에 나는 절을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잠깐 잊고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겨울이 아니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높고 가파른 계단도 오르고, 옛 느낌이 물씬 풍기는 구멍가게에 들어가 하릴없이 껌을 사며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래도 절(寺)은 비탈 위 어디쯤에 덩그러니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는 절 또한 꼬불꼬불 이어진 좁은 골목길 끝에 다른 집들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 행색으로 다소곳이 엎드려 있었다. 출입구도 여닫이가 아니라 미닫이 새시 문이었다. 그런 절 입구는 처음 봐서 긴가민가했지만 안에 들어가니 다행히 품격을 제대로 갖춘 절간이었다. 그러나 법당이고, 요사채고 평지에 있지 않고 모두 한 층계씩을 차지하고 있는 특이한 구조였다.
그때 안 것이 감천동은 전쟁 통에 갈 데 없는 태극도 신도들과 피난민들이 산비탈에 모여 층계를 이루듯 집을 지어 살면서 이뤄진 동네란 것이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남아 어려운 사람들의 둥지가 되고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 몇 년 후, 감천동은 ‘감천문화마을’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관광객이 모여드는가 싶더니 외국인 관광객들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유명세를 타게 되면서 감천문화마을은 그리스의 ‘산토리니’나 이탈리아의 ‘친퀘테레’에 비유되기도 하고, 한국의 ‘마추픽추’나 ‘레고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내 보기엔 집을 채색한 것이나 좁은 골목, 주민들의 주거지가 경사지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이탈리아의 ‘친퀘테레’와 가장 닮았다. 물론 집의 채색 이유는 다르다. 바다를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친퀘테레의 집들이 바다에 조업 나간 어부들이 멀리서도 자신의 집을 잘 찾기 위해 칠한 것이라면, 감천마을의 집들은 가난한 시절의 흔적이다. 페인트를 넉넉히 살 형편이 못 되어 되는대로 얻어 칠하다보니 색깔이 제각각인데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상품이 된 것이다. 궁핍했던 시절, 1평 정도의 공간에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오글거리며 산 생활의 역사가 관광지로서의 의미를 만들고 있기도 하다.
관광객들은 그런 것을 보기 위해 감천문화마을을 찾는다. 그러나 주민들은 불편하다. 관광객들 중에는 마을에 주민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민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주민들로 하여금 마을을 떠나고 싶게 만든다.
감천문화마을을 찾는 관광객의 숫자는 매년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2011년 3만 명이던 관광객이 지난해에는 257만 명이란 기록을 세웠다. 올해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아올지 알 수 없다.
나는 이제 그곳에 가지 않는다. 득시글거리는 관광객들 사이를 지나 절에 가는 것도 불편하고, 사람들이 붐비니 감천마을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이색적인 감흥도 사라져버렸다. 적요하기까지 하던 골목은 사람들의 소음으로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관광객이 넘쳐나기 전에는 그래도 발전하는 부분이 있어서 주민들도 좋았다. 열악하기 짝이 없던 환경도 좋아지고 마을 미화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예술작품이 마을 곳곳에 세워졌다. 주민편의시설이 들어서면서 삶의 여건도 개선되었다. 그속에서 주민들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경제활동까지 하게 되니 활기와 의욕이 넘쳤다.
그런데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땅값이 치솟고 집값이 올랐다. 월세도 계속 상승세다. 그러면 경제력이 약한 주민들은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 자리를 외지인들이 차지하여 실속을 챙긴다. 현재 감천문화마을의 점포 중 절반은 외지인들이 운영권을 갖고 있다.
그러니 원주민들은 넘쳐나는 관광객이 성가시다. 떠나는 주민도 많아졌다. 2000년 무렵 2만여 명이던 주민이 지금은 7300명 정도만 살고 있다. 2009년 이전에는 경제사정이 좋아진 사람들이 떠났지만 요 몇 년 사이에는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 수 없어 떠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주민의 이탈이 가속되면 감천문화마을의 정체성이 사라져버린다. 마을 주민이 소외되고선 해마다 늘어나는 관광객 수도 의미가 없다. 그 마을의 주인은 관광객이 아니라 원주민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국민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부탄은 국민의 질 높은 삶을 위해 일찌감치 관광객 수를 제한했다. 그리스의 산토리니도 방문객 수를 줄였고, 최근에는 페루의 마추픽추가 관람시간을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감천문화마을도 하루빨리 인원이나 방문시간을 제한하여 주민의 피해를 줄이고, 그로써 오랫동안 기억에 깊이 남는 ‘감천문화마을’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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