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 동쪽으로 간 이유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스승이 떠난 뒤 마하라지는 혼자 히말라야에 머물며 수행을 계속한다. 그가 다시 큰 스승을 만나기까지는 무려 35년이나 지난 뒤였다. 단 한 번의 알 수 없는 실수 때문에 받게 된 고통치곤 너무 너무 오랜 세월이다. 하마터면 그는 끝내 스승을 못 만날 뻔 했다.
왜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려야 했을까? 늘 강조하듯이 세상에 고수(高手)는 너무 귀하고 드물기 때문이다. 성산(聖山)인 히말라야에는 고수들이 많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만큼 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고수가 되는 게 어렵다는 얘기다. 도를 이룰 확률이 백만분의 일이라는 말이 절대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연히 큰 스승을 만났다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절대 놓지 말아야 한다. 마하라지처럼 35년을 기다리기 싫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그 스승은 왜 갑자기 떠났던 것일까? 이유를 잘 살펴봐야 한다. 두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제자들의 식탐 때문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그들은 하루 한 끼만 먹었다. 모래도 소화시킨다는 왕성한 스무 살의 나이였지만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하루 한 끼에 그것도 쌀과 버터와 소금뿐이었다.
스승이 그렇게밖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수행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게 음식이다. 수행자가 먹는 것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수련은 절대 앞으로 전진 할 수 없다. 하루 열심히 수련하고 배고프다고 저녁에 고기와 술을 맘껏 먹고 마시면 그 사람의 수련은 제자리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육체라는 물질 속에 갇혀 있는 영혼을 본래의 모습인 신(神)으로 되돌리는 과정이다. 우리는 본래 신이지만 오랫동안 육체 속에 갇혀 살면서 본래의 모습을 잊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길 잃은 신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모습을 자각하면, 깨달으면 되는 게 아닐까? 보통 그렇게 생각하고 많은 책들이 그렇게 얘기한다.
그러나 육체가 변화되지 않는 깨달음은 실재가 아닌 착각이다. 실재 내 근본자성(眞我)을 직접 육체의 눈으로 보고 체험해야 한다. 그런데 육체가 바뀌지 않으면 절대 자신의 근본자성을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육체의 형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육체를 바꿔야 한다. 물질의 육체를 아스트랄체(영체)로 바꾸지 않으면 영혼은 절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가 없다. 자신은 분명 깨달았다고 생각하는데 여전히 폭식을 하고 여전히 섹스를 즐기고 화내며 일반사람들과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면 자신의 깨달음을 돌아봐야 한다.
가짜가 아닌 진짜를 깨치겠다는 진지한 수행자라면 음식의 양을 조금씩 줄여야 한다. 음식의 종류도 무겁고 탁한 육식 위주가 아니라 아스트랄체에 가까운 맑고 가벼운 과일과 야채 위주로 바꿔야 한다. 수행과 먹는 게 일치되어야 비로소 수련은 앞으로 전진(前進)한다.
그러나 마하라지와 그의 친구는 너무 젊었다. 스무 살의 나이는 기초대사량이 높고 육체적으로 가장 왕성한 나이이기 때문에 식욕을 조절하기가 매우 어렵다.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 욕구이기 때문에 이 둘을 컨트롤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나이 많은 사람도 어려운데 왕성한 스무 살의 나이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성욕은 차라리 쉽다. 히말라야 깊은 산중에서 여자를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는 것은 매일 부딪치는 일이라 언제나 위기다. 먹는 것에는 여섯 가지 지각(色聲香味觸法)이 모두 동원되기 때문에 특히나 어렵다.
각각의 감각들도 욕심을 내지만 마음(法)도 언제나 과식할 핑계를 찾는다. 어제 약간 적게 먹었으니까 오늘 조금 더 먹어 보충을 해야 한다. 또는 요즘 몸이 약간 부실하니 먹는 것으로 보충을 해야 한다. 어쩐지 오늘은 몸살기가 있어서 잘 먹어줘야 한다. 핑계가 없으면 어쩐지 내일은 많이 먹지 못할 것 같다며 오늘 과식과 폭식을 용인한다.
그래서 마하라지의 스승은 제자들의 곁을 떠났던 것이다. 아직 젊어 식욕을 제어하기는 어렵고 식욕을 제어하지 못하면 결국 수행은 제자리걸음일 테니 수행의 완성은 어렵다고 본 것이다. 즉, 완성의 때가 아니라고 판단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수행은 때가 있다. 때가 무르익지 않으면 절대 한 사람의 수행은 완성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의 때는 나이 오십이 되면 온다. 그래서 우리말에 ‘어서 오십시오.’ 라는 말이 생겼단다. 청산선사께서 하신 말씀이다.
아무튼, 그들은 최적의 조건 즉, 훌륭한 스승과 최고의 수행터까지 갖췄지만 그들의 수행은 단기간에 완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수행에 지름길이란 없다는 것이다. 한 방에 도를 통한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실천이 불가능한 이론에 불과하다. 사람은 절대 한꺼번에 도를 깨닫고 이룰 수 없다. 육체가 절대 한 방에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에 어떤 사람은 몸은 바뀌지 않더라도 정신으로 깨닫는 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천만에다. 앞에서 얘기했지만 몸이 깨닫지 못하고 정신만 깨닫는다는 것은 상상에 의한 착각이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몸도 정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마하라지와 그의 친구 또한 단기간에 식욕을 버리고 몸의 습관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스승은 알았던 것이다.
스승이 떠났던 두 번째 이유는 불신(不信)이다. 스승은 깊은 물속에서 삼매에 들어가 있었다. 1시간이 넘어가자 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졌다. 이 상황은 국선도를 보급한 청산선사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청산선사가 미국에 갔을 때 국선도를 하면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물속에서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청산선사는 불에 타지 않는 시범은 전국을 돌며 많이 보여줬는데 물속에 있는 시범은 보여준 적이 별로 없었다. 시범 보일 장소도 애매하고 불에 타지 않는 시범보다 관심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미국에서 물에서 시범 보일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유명한 후버댐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산선사는 1975년에 미국의 유명한 후버댐에 들어가 17분 50초를 견뎠다. 30분 또는 1시간이 아니고 17분 50초인 이유가 재밌다.
안전을 우려한 사람들이 혹시 물에서 질식이라도 하면 당기기 위해 줄을 매달고 들어갔는데 시간이 길어지자 불안해서 줄을 당겨버렸던 것이다. 청산선사는 줄에 끌려 나오며 조금 더 있으려고 했는데 너무 빨리 당겼다며 투덜거렸다고 한다.
믿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불에 타지 않고 물속에서도 견딘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평범한 마을사람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스승을 믿었어야 한다. 그래서 마하라지가 불같이 화를 낸 것이다. 그래서 스승은 ‘내가 혼자서 물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슨 연고로 너희들은 나를 물 밖으로 끄집어냈느냐?’며 불같이 호통을 쳤다.
제자가 스승을 믿지 못하면 도(道)는 전수될 수 없다. 도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는 일반인이 상상할 수도 없는 세계이고 죽음의 너머에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스승을 믿지 않으면 절대 이어질 수 없다.
달마대사가 9년 동안 벽을 보며 기다렸던 것도 믿음을 가진 제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9년 뒤 마침내 혜가(慧可)가 왔다. 기다리던 제자가 나타났지만 달마대사는 쉽사리 판단을 내리지 않고 미적거렸고, 혜가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팔을 잘라 바쳤다.
히말라야 바바지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어떤 남자가 바바지에게 도를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바바지가 있는 절벽 높은 곳까지 찾아와 가르침을 달라고 했고, 바바지가 제자로 삼기를 주저하자 남자는 제자로 삼지 않으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겠다고 했고, 바바지가 그럼 몸을 던지라고 하자 남자는 주저 없이 절벽으로 몸을 던졌다. 물론 바바지는 죽은 남자를 데려와 다시 살려 주었고, 달마대사도 혜가의 팔을 붙여 주었다.
선한 업(業)을 쌓는 것, 그것이 수행이다
스승의 은혜는 부모의 은혜 못지않다. 부모가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듯이 스승은 제자에게 영혼의 눈을 뜨게 한다. 영혼의 눈을 뜬다는 것은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 눈을 뜨기 전의 영혼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스승은 반드시 제자의 영혼을 깨울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스승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제자의 영혼을 깨우는 방법은 크게 보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눈 뜨는 법을 가르쳐 스스로 눈을 뜨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기운을 제자에게 주어 영혼을 눈뜨게 하는 방법이다.
인도의 스승들은 대부분 제자에게 직접 기운을 주는 방법을 택한다. 요가난다, 라히리 마하사야, 비베카난다 등 대부분 스승에게서 직접 기운을 받아 눈을 떴다. 자신이 평생 동안 힘들게 쌓았던 공력을 제자에게 아낌없이 모두 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은혜가 얼마나 크겠는가. 그래서 스승은 믿음을 갖춘 제자를 찾고 기다리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제자에게는 힘들게 쌓은 공력을 주더라도 낭비되고 헛일이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힘들게 쌓은 모든 것들이 이어지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기억력이 좋은 분들은 이쯤에서 필자의 말이 왔다 갔다 한다는 의심이 들 수도 있다. 나는 앞의 글에서 스승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늘 의심하고 눈을 부릅뜨고 잘 살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이번 글에서는 스승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한다.
왔다 갔다 하는 말이 아니다. 올바른 스승을 만나면 끝까지 믿고 따르고 올바르지 않은 가짜에게는 절대 속지 말라는 말이다. 인도에도 가짜 도사가 많지만 한국도 마찬가지다. 종교나 정신수련 단체에서 가짜에게 속아 돈과 시간과 몸을 버리는 순진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진짜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하수는 고수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착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스승을 찾는 것이다. 에게? 겨우?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대개 사이비에 속는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 악한 마음이나 비뚤어진 속성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과 악의 구별은 어렵지 않다. 이기적이면 악하고 이타적이면 선하다. 요즘 유행하듯 내 기준만 강조하는 것이 바로 악(惡)한 것이다. 사이비에 빠지는 대표적인 사례로 종말론에 속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 또한 본인의 욕심에서 싹이 튼 것이다.
즉, 앞으로 세상에 종말이 오는데 다른 사람은 다 죽고 자기는 잘 살고 큰 벼슬을 누리며 천년동안 복되게 산다고 한다. 아무런 기준도 없고 아무런 설득력도 없는 이런 감언이설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것은 모두 이기심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이타심이 있으면 이런 황당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선(善)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도를 이루고 말겠다는 진실한 마음이 있으면 머지않아 스승은 진심을 알아보고 꼭 찾아갈 것이다. 물론 이때 꼭 사람이 가는 것은 아니다.
우디바바(UDDIBABA) 캠핑장에서 인도의 전통차 짜이 한 잔과 야채 샌드위치를 먹으며 주인에게 이런저런 문의를 해보니 생각보다 조건이 훨씬 좋았다. 하루 숙박에 세끼의 식사와 특별 간식까지 제공하는데 모두 합쳐 한국 돈으로 이만 오천 원 정도였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차량이었다. 택시기사가 자동차는 절대 올라갈 수 없다고 한 곳까지 자동차로 가능하다고 했다. 힘들게 걸어 올라올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것도 600루피에. 거리를 생각하면 내가 타고 온 택시비의 절반 값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대로 그냥 눌러 앉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폭포 밑에서 택시기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택시가 기다리는 곳까지 내리막길이지만 아무리 빨리 가더라도 30분 쯤 늦을 것이다. 그러면 뻔뻔한 택시기사는 분명 요금을 더 내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그냥 이곳에 눌러 앉아버릴까. 그러면 그는 몇 시간을 더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다 밤이 되면 빈 차로 투덜거리며 내려갈 것이다. 퇴근해서 집에 가서도 그는 기분이 나쁠 것이고 그의 가족들도 한국에서 왔다던 낯선 여행자를 원망할 것이다. 그래도 그가 나를 먼저 속였으니 나도 그를 속일 권리가 있지 않는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복수를 강조하지 않았던가.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던 내게 마하라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수행이 진척되는 것은 단순하게 수행을 계속했기 때문이 아니라, 전생에 지은 업(業)을 포함해 모든 선(善)한 업이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나는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우디바바를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