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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길 잃은 신(神)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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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길 잃은 신(神)이다-3
  • 서창덕
  • 승인 2019.07.04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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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들은 소의 등에서 산다
서창덕
서창덕

신성한 공간에서 악취를 풍기는 축사

리시케시의 요가 니케탄 아쉬람(Yoga Niketan Ashram)에 도착한 지 일주일쯤 되자 나는 비로소 여유가 생겨 아쉬람 이곳 저곳을 둘러보게 되었다. 아쉬람은 리시케시에서 유명한 람 쥴라 다리 옆 약간 경사진 산허리에 있었다. 1만평 쯤 되는 큰 넓이에 명상홀과 요가홀 베단타홀 도서관 숙소 등 다양한 건물들이 언덕에 비스듬히 자리를 잡고 있었고, 각 건물들 사이에는 화단이 있어 예쁜 꽃들이 가득했다. 건물들보다 높게 솟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이곳이 리시케시를 대표하는 전통 있는 아쉬람임을 강조했다. 이곳저곳 예쁜 꽃들과 건물들을 사진에 담다 보니 어느새 아쉬람의 가장 위쪽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뜬금없는 축사를 발견하고 뜨악했다. 이런 걸 요즘 용어로 ‘갑분싸’라고 한다던가. 때마침 모든 소들을 밖에다 몰아놓고 청소를 하고 있어 주위에 악취가 진동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 축사가 있어야 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소들은 열 마리가 넘었고 축사의 넓이도 100평은 훨씬 넘어 보이는 큰 축사였다. 한국이라면 100마리쯤 키워도 충분한 크기였다. 보통의 축사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거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해야 하는데 이 축사는 아쉬람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라고 할 수 있는 언덕의 가장 위쪽에 있어 히말라야에서 바람이 내려오면 축사의 똥오줌 냄새가 수행자들이 기거하는 곳까지 내려갔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우유를 짜내는 젖소도 아니고 농사에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키워서 도축장에 내다 팔아 돈을 벌겠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유익한 존재라고 하지만 인도의 소들은 유익함과는 한참 거리가 먼 불편한 존재다.
인도의 소(사진: 서창덕 제공).
도로를 차지한 인도의 소들.(사진: 서창덕 제공).

신성한 존재, 인도의 소

인도가 신들의 천국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인도는 소들의 천국이다. 3억이 넘는 신들이 인도에 산다고 하지만 그 많은 신들은 도대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아무리 찾아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소들은 아무데나 넘쳐난다. 집에도 있고 길에도 있고 심지어 좁은 다리 위에도 있다. 그들은 아무 것이나 먹고 아무 곳에서나 자고 싼다. 나는 인도에 오면 오로지 땅만 보고 다니는데 자칫 한눈을 팔았다간 소똥에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소똥에 미끄러져 크게 다치거나 생을 마감했다면 그건 좀 곤란하지 않겠는가. 인도에서 소들은 정녕 자유로운 존재다. 차가 밀려서 가보면 십중팔구 길에 소가 한가로이 누워있다. 오토바이와 차와 사람들이 소를 피해 빠져나가느라 북새통이 벌어져도 소는 느긋하게 그 모두를 무심하게 지켜보며 졸거나 되새김질을 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인도의 소는 먹고 싸고 잠자는 것 빼면 특별히 할 일이 없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고속도로 위에도 소가 있다. 3년 전 나는 인도의 서쪽 라자스탄 사막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소 두 마리가 한가롭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두 마리의 소가 상상이 가는가? 물론 경부고속도로처럼 많은 차가 다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속 100킬로미터를 달리는 고속도로 위다. 나는 매우 놀랐지만 다행히 차를 모는 운전사는 놀라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차가 사람을 치는 것보다 차가 소를 치는 게 죄가 더 무겁다고 한다. 소들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모른다면 거기서 그럴 리가 없다.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하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을 신이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도에 3억이 넘는 신들이 살고 있다고 하지만 어디에 살고 있는지 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다. 신들은 절대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신은 물질차원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에 보인다면 그건 이미 신이 아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존재는 신이 물질계 차원으로 바뀐 신의 아바타다. 그래서 신에게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신의 화신(아바타)을 만나는 것이다. 신의 아바타를 마스터(스승)라고 한다. 이 대목에서 제임스 카메룬의 아바타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아무튼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의 화신이라고 해도 평범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절대 자기 수준 이상의 존재를 알아볼 수 없다. 이때 필요한 존재가 바로 안내자이고 인도에서는 그 역할을 소가 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인도에서 소를 먹거나 차로 받으면 벌이 무겁다. 그런데 재밌는 건 소가 다른 종교에서도 비슷한 역할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의 절에 그려져 있는 벽화의 대부분은 소를 찾는 그림 심우도(尋牛圖)다. 여기서 소는 나를 깨달음의 세계로 안내하는 신성한 존재다. 그래서 불교가 성행했던 고려시대에는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힌두교에서 소는 최고의 신(神) 쉬바가 타고 다닌다. 그래서 소를 잘 섬기고 따라가면 최고의 신 쉬바와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중국의 도교(仙道)에서 소는 단전(丹田)이라는 밭을 가는 철우(鐵牛)다. 단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땅을 깊게 갈아 밭을 만들어야 하는데 반드시 기운이 강한 쇠소(鐵牛)가 해야 한다. 철우가 밭(丹田)을 만들어 놓으면 인간이 마음의 씨를 뿌리고 그것이 자라 따듯한 기운이 되고 구름이 되면 인간이 신의 세계인 하늘로 승천한다. 그러므로 도교의 첫 안내자도 바로 소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종교에 소가 등장하지만 모두 현실세계에 살아 있는 소는 아니다. 불교벽화 심우도(尋牛圖)에서 소는 나의 마음이다. 화내고 즐거워하는 내 마음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지켜보고 연구하다 보면 그 마음이 진짜 나(眞我)에게 데려다 준다. 내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으니 소라고 표현한 것이다. 힌두교에서 쉬바가 타고 다니는 소는 조금 의미가 복잡하다. 힌두교 최고의 신인 쉬바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신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신을 최고의 신으로 받드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데 바로 쿤달리니 때문이다. 사람에게 쿤달리니가 각성되어 차크라를 타고 상승하면 몸과 마음이 신의 경지로 탈바꿈한다. 중국의 도교에서 사람이 용이 되어 승천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롭게 만드는 힘이 소를 닮아 쿤달리니를 소의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브리마사원(사진: 서창덕 제공).
브리마사원(사진: 서창덕 제공).

나는 죽음 앞에서 소를 만났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몇 번의 소를 만난다. 가까운 사람이 죽어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낄 때, 갑자기 큰 병에 걸려 삶에 제동이 걸릴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삶이 허무하다고 느낄 때, 문득 나라는 존재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이런 모든 것들은 모두 자신을 신에게 안내하는 소가 나타난 것이다. 나도 그랬다.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온 몸이 망가져 죽어가고 있었다. 병원에서도 완치시킬 약은 없고 식단을 조절하며 죽어가는 속도를 늦추는 처방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서 준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우리의 전통수련법인 국선도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를 안내한 소는 바로 병이었다. 조사해 보면 병 때문에 수행자가 되었거나 출가를 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 죽을병에 걸리면 많은 것들이 의미를 잃는다. 의미를 잃지 않고 끝까지 집착하는 사람은 대개 병을 극복하지 못한다. 오로지 살기 위해 국선도에 전념했더니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다. 믿어지지 않아 나는 아직도 그때의 병원검진표를 보관하고 있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하는 바람에 쿤달리니가 깨어났다. 그러나 나는 요가의 쿤달리니 현상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었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요가를 시작하게 되었고 최고의 요가를 배우기 위해 인도와 미국까지 가게 되었다.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언제나 내 앞에 안내자가 나타났다. 도교를 배우기 위해 중국의 화산(華山)까지 가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인도의 소가 진짜 신성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인도의 길에 넘쳐나는 소들은 주로 쓰레기통에서 끼니를 해결하는데 대개는 종이를 먹거나 버려진 음식을 먹는다. 도심 한복판에 그들이 먹을 맛있는 풀밭은 없다. 쓰레기통에 신전에 바친 꽃이라도 있으면 소에겐 성찬이다. 심지어 비닐도 먹는다. 어떻게 그 많은 비닐을 먹고 소화를 시키는지 신기하다. 소가 진짜 신성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 먹는 많은 양의 비닐 때문이다. 신의 능력이 없으면 그 많은 비닐을 소화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도 특이한 경험을 했었다. 3년 전에 나는 인도의 푸쉬카르에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브라마사원을 찾아가고 있었다. 뉴델리에서 서쪽으로 뿌연 먼지 가득한 사막의 비포장 길을 달려 겨우 어떤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 공터에 차를 세우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물어물어 사원을 찾아가고 있는데 흰 소 한 마리가 자꾸만 내 앞에서 걸어갔다. 혹시 앞에서 갑자기 똥을 싸든지 뒷발에 채일 수도 있으니 앞질러 가자는 생각에 걸음을 빨리하면 소는 나와 경주하듯 더 빠른 걸음으로 내 앞에서 걸어갔다. 인도의 소는 절대 빨리 걷는 법이 없다. 사람들이 소를 신성시해 잡아먹는 일도 없고 특별히 할 일도 없기 때문에 소들은 늘 느긋하다. 비닐도 소화시키기 때문에 굶어죽을 염려도 없다. 심지어 고속도로 위에서도 그들은 한가롭다. 그런데 이 소는 내 앞에서 숨까지 헐떡거리며 바쁘게 앞장서 올라가더니 정확히 내가 가고자 했던 그 아쉬람 입구에 서서 나를 기다렸다. 입구가 좁고 표지판도 없어 그 소가 아니었으면 많이 헤맸을 것이다. 그래, 고맙다 하며 소의 등을 두드려 주었더니 뭘 이 정도 하는 표정으로 멀뚱히 먼 곳을 바라보다 가쁜 숨을 고른 뒤 느릿느릿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제 오늘 다른 할 일은 없다는 듯이. 그날. 흰 소를 따라간 그 브라마 사원에서 나는 처음으로 우주의 의식을 체험했다. 소똥이 떠다니는 더러운 호수였는데 사원을 안내하는 사제가 브라마신에게 가기 위해서는 몸을 씻어야 한다며 기어이 내 등을 더러운 호수로 떠밀었다. 사제의 끈질긴 요구에도 차마 목욕은 하지 못하고 시늉이라고 하기 위해 발을 담그고 손을 씻고 물방울 몇 개를 얼굴에 찍어 바르고 잠깐 눈을 감았다. 꼭 명상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꾸 더 많은 걸 요구하는 시끄러운 사제의 닦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명상하는 듯 눈을 감자 사제도 더 이상 옆에서 떠들지 못했다. 아, 그런데 눈을 감자 세상이 갑자기 밝아졌다. 햇볕이 쨍쨍한 대낮에 눈까지 감았는데 뭐가 밝아졌다는 것이냐고 따지면 나도 더 이상 설명할 방법은 없다. 진짜 호수만큼이나 넓고 밝은 지혜가 내 몸 안으로 쑥 들어왔다. 아니다. 반대로 내가 지혜 속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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