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황령산 칼럼에 필자는 쓰레기와 관련된 글을 써왔다. 그 맥락을 이어서 2015년 1월 1일부터 매일 쓰레기 보고서를 쓰기 시작해서 12월 31일까지 썼다. 그 중에서 마지막 열 꼭지를 황령산 칼럼으로 갈음한다. 365 꼭지 글의 결론으로 쓰레기 문제 해결방안에 관해 사자성어를 만들어 적은 글이다.
355. 12월 21일. 月. 수지. 아버지가 치료를 다 마치고 건강해지셨다.
쓰레기 보고서 다섯 번째 정리
가장 중요한 원초적 근본적인 방법
바로 전의 세 꼭지 글에서 쓰레기 문제의 해결을 위한 세 가지 방향을 잡았다. 이제 이 방향에 따라 쓰레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방법을 이야기할 차례다. 이미 이 연재 글의 86번째 글에서 열두 가지 방법을 제안한 바 있다. 이제 그 방법들 말고 전혀 새로운 방법을 제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열 개로 줄이며 좀 더 구체화시켜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 방법들은 대단한 비법은 아니다. 당연히 평범하다. 너무 뻔할 정도로. 하지만 그 뻔한 것을 실천하는 것은 가장 마땅한 방법이다. 제일 첫 번째 방법은 자청자장(自淸自場)이다. 자기 집, 건물, 가게 앞 쓰레기를 자기가 청소하는 일이다. 이 것만 잘 해도 쓰레기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다. 우리는 자기 집 안 청소를 안할 수 없다. 열역학 제2 법칙인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처럼 쓰레기 증가의 법칙에 따라 안하면 난장판이 된다. 집안 대청소 날을 잡기도 하여 주부 만이 아니라 온 가족 식구가 동원되어 집안 구석구석 청소를 한다. 가정부에게 맡길 수도 있지만 가족 구성원이 스스로 해야 집안이 잘 돌아간다. 그런데 집 밖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언제부턴가 집 밖은 환경미화원으로 불리게 된 청소부가 치우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자기 집 앞에 쌓인 눈은 집 주인이 치우는 것으로 되었지만 자기 집 앞에 널린 쓰레기에 대해서는 별 상관을 안한다. 살아가는 방법이 문화라면 우리는 좋지 않은 문화를 가진 것이다. 그래 가지고서는 쓰레기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다. 결국 자청자장은 쓰레기 문제해결의 가장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방법이 된다. 자청자장은 유동적 의미이기도 하다. 꼭 내 집, 내 건물, 내 가게 앞이라는 부동의 장소 만이 아니라 내가 움직이며 머물렀던 내가 있었던 장소에서 내가 버릴 쓰레기를 자기가 스스로 치우는 일까지 포함한다. 가령 산에 들어가서나 공원 벤치에서 잠시 쉴 때 등 내가 머물렀던 곳에서 내가 있었던 흔적을 치우는 일이다. 첫 번째 자청자장만 잘 해도 한결 더욱 깨끗하며 살기좋은 세상이 된다.
356. 12월 22일. 火. 서울. 동방OB 날이 최강 미세먼지날이란다.
쓰레기 보고서 여섯 번째 정리
다시 부활해야 마땅한 마을청소 방법
두 번째 방법은 첫 번째 방법의 연결이자 확장이다. 내가 아니라 우리가 되어 우리 마을 청소를 같이 함께 하는 것이다. 사자성어로 오소오리(吾掃吾里)다. 우리 어릴 적에는 이런 일을 했었다. 특히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때는 한 달에 한 번 아침 일찍 동네 주민들이 대청소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이런 노래가 동네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새벽 종이 울렸네 / 새 아침이 밝았네 /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그런데 내가 예전에 세미나에서 한 달에 한 번 마을 대청소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를 듣던 토론자는 그런 것이 유신 시대로 돌아가는 것같아 불편하다고 했다. 철권 통치자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를 위해 1972년에 강행된 유신헌법에 트라우마를 가질 수 있어도 마을 대청소 제안을 그렇게 정치적으로 연결시키니 내 생각도 불편했다. 마을 대청소를 정치적 이념의 문제로 귀결시킬 수는 없다. 마을 대청소는 새마을운동이 아니었더라도 마을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해왔던 것이다. 국가가 시켜서 한다면 일시적으로 끝난다.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인 마을 주민이 스스로 할 때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 결국 새마을 운동에 따른 마을 대청소는 없어졌다. 마을 공동체도 사라졌다. 마을 대청소가 없어지면서 생겼던 반상회도 흐지부지 없어졌다. 그나마 있었던 주민모임이 없어진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아버지회, 부녀회 등 주민자치 모임을 통해 마을 대청소를 부활하는 것이다. 이를 관 조직에서 지원해도 좋다. 실제로 이렇게 하는 곳이 있다고 들었다. 내가 꼭 취재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대구 서구에 속한 모든 동(洞)이 그렇게 한단다. 아주 추운 12월과 1월만 빼고 매달 5일 아침에 모여 쓰레기를 주우며 마을 대청소를 한단다. 또 다른 어디에서 그렇게 하는 곳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가서 마을 대청소가 잘 되는 모습을 실제로 보고 싶다. 시늉만 내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마을을 이루려는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357. 12월 23일. 水. 서울. 올림픽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쓰레기 보고서 일곱 번째 정리
이제라도 해야 할 생태교육의 방법
세 번째 방법은 쓰레기 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기반적이며 포괄적인 활동이다. 바로 생태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교육에서 가장 등한시되는 것이 생태교육이다. 영어교육, 그것도 영어 조기교육에는 적극적이어도 생태교육에 관해서는 무심하다. 과외 학습인 피아노 등의 악기 연주나 축구 등의 운동 교육에는 관심이 크지만 생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설령 생태 교육을 하더라도 자연이나 과학 관련 과목 등에서 일개 단원으로 다루어질 뿐이다. 학교에서 정식 학과목으로 다루어지지 않더라도 중요 취급되는 것은 경제교육이다. 아이 때부터 경제관념을 심어 주어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생태교육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생태를 중국에서는 생활상태(生活狀態)라고도 풀어서 쓴다. 여기서 생활이란 인간의 생활 만이 아니라 생태계에 걸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의 활동이다. 그들이 서로 어떻게 얽히고 설키며 살아가는지 그 상태를 알며 이해하는 것이 생태교육이다. 생태학이란 전문적인 과학이지만 생태교육을 하는데 전문적인 생태학까지 알 필요는 없다. 다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앞서 만물 중 유일하게 고질적 쓰레기를 배출하고 사는 인간(Homo rubbish)이 어떻게 다른 생명체들과 어우러져 살아갈 것인지 깨우침을 얻도록 하는 것이 생태 교육이다. 어른들을 대상으로는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으나 인문학을 넘는 생태학을 다룰 필요가 있다. 이름하여 인문생태학이다. 신문에서도 정치면, 경제면, 사회면, 문화면, 국제면, 스포츠면처럼 생태면이 발행될 필요가 절실하다. 아직 신문 본지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일주일에 한 번 생태 섹션면을 발행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생태교육을 사자성어로 표현한다면 지각생태(知覺生態)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계의 전반적 생활상태에 관해 알며 깨닫도록 하는 생태교육이다. '인간과 환경'이 아니라 '생태와 인간,' 가령 이런 과목명이 적당할 것이다.
358. 12월 24일. 木. 서울. 롯데시네마에서 <내부자>를 보았다.
쓰레기 보고서 여덟 번째 정리
사회적 신뢰도도 다지는 실제적 방법
네 번째 방법은 세 번째 방법의 일환으로 우리 생활에서 가장 가깝게 실천하는 것이다. 생태교육이 전반적이라면 쓰레기를 마구 함부로 아무 데나 버리지 않고 쓰레기통에 잘 버리도록 교육하는 일은 구체적이다. 예전에 아차산 밑 모 중학교 정문 위에 걸린 횡단막(placard)을 보고 반가운 적이 있었다. 학생들이 꼭 지킬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잘 버리기였다. 요즘 쓰레기처럼 별 것 아닌 걸 가지고(?) 학교 정문에 붙이는 학교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걸 붙이도록 한 교장 선생님은 쓰레기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신 것같다. 그렇게 붙였으니 선생님들도 학생들에게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도록 강조했을 것이다. 어느 조직이든 톱매니지먼트의 생각이 중요하다. 물처럼 좋은 기운은 아래로 흐른다. 물론 학생들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잘 따랐는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그 플래카드에 적힌 훌륭한 생각이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렇게 쓰레기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어느 한 분이 계셨다는 사실이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은 학생의 기본 도리이면서 애, 어른 할 것없이 인간의 기본 도리다. 가령 산에 올라갈 때 몸에 좋다는 건강 쥬스를 가지고 올라가 마시고 비닐 봉지를 산 아무데나 버리는 행위는 아주 못된 짓이다. 산에서 사탕을 먹고 그 작은 사탕봉지를 주머니에 넣고 내려와 쓰레기통에 버리면 좋으련만 그것도 귀찮아 산에 슬며시 버리는 건 더욱 얄밉다. 모두 산에 가하는 야만적 폭력이며 지독한 생태범죄다. 도심 길거리나 골목에서의 쓰레기 무단투기도 마찬가지다. 소수 야만인들의 마음 속에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도사리고 있다. 아주 강팍한 거친 마음이다. 어릴 때부터 나 만이 아닌 밖을 생각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온전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 사회의 신뢰도는 자연스레 올라간다. 이에 쓰레기(垃)를 함부로(亂) 버리지(投) 말라(勿)는 뜻에서 물란투랄(勿亂投垃)이라는 사자성어를 얄팍한 한자실력으로 어줍게 짓는다.
359. 12월 25일. 金. 서울. 인왕회 모임 장소 가마골 답사갔다.
쓰레기 보고서 아홉 번째 정리
재고해야 옳을 쓰레기 종량제 방법
우리 길거리에 언제부턴가 쓰레기통이 없어졌다. 아마도 쓰레기 종량제와 맞물려 그리 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학가 정류소 등 아주 간혹 쓰레기통이 있는 곳이 있다. 하지만 쓰레기통은 드물고 귀하신 존재다. 쓰레기통이 없는 이유는 관공서에서 쓰레기통을 철거했기 때문이다. 쓰레기통이 있으면 가정이나 가게에서 나오는 생활 쓰레기를 종량제 봉투에 담아 버리지 않고 길거리 쓰레기통에 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 종량제는 쓰레기 소각장이나 매립지로 가는 쓰레기의 양을 줄이나 쓰레기통도 없는 길거리나 골목에 무단투기되는 쓰레기양을 늘린다. 줄어든 쓰레기양은 쓰레기가 모이는 매립지나 소각장에서 확인되어 통계수치로 잡히지만 늘어난 쓰레기양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쓸어담기는 신세도 못되고 구천을 맴돌 뿐이다. 그동안 쓰레기 종량제에 관해 생각한 바 그 결론은 쓰레기 종량제는 쓰레기 악순환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쓰레기 종량제 실시 → 무단투기 쓰레기 증대 → 길거리 쓰레기통 철거 → 버릴 곳 없어 길거리 쓰레기 증대 → 쓰레기 종량제 지속적 강화의 연결 순환이다. 쓰레기 종량제로 매립지나 소각장으로 가는 쓰레기 양이 줄더라도 악순환은 마찬가지다. 특히 쓰레기 종량제로 인한 주민들 간의 분란은 감정의 쓰레기로 분출된다. 이제 우리가 행하고 있는 쓰레기 종량제라는 시행제도(制度)에 대해 가만히 다시 생각(再考)할 필요가 크다. 쓰레기 종량제보다 쓰레기 분리배출의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시행되었다면 국민들의 호응을 얻기가 더욱 좋았을 것이다. 종량제를 통해 쓰레기 처리비용을 국민들 각자에게 부담하는 것보다 쓰레기 문제에 관해 범국민복지 차원에서 정부가 쓰레기 분리배출을 위한 수단들을 원활히 제공하며 국민 시민 주민들에게 협조를 구한다면 수월하게 쓰레기 무단투기 문제도 해결되기 쉽다. 이에 종량제라는 강제적 제도(制)를 없애고(撤) 쓰레기 문제해결을 위한 순리적 방법(法)을 취한다(取)는 뜻에서 철제취법(撤制取法)이라고 감히 적는다.
360. 12월 26일. 土. 서울. 철없던 인왕회 친구들을 만났다.
쓰레기 보고서 열 번째 정리
쓰레기통을 알맞은 곳에 놓는 방법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면 폭넓은 관점(perspective)으로 원점(zero base)에서 생각해야 옳다. 이를 위해 선각자의 생각을 빌리면 도움이 된다. 커머너(Barry Commonor, 1917~2012)가 1971년에 쓴 <The Closing Circle: Nature, Man and Technology>는 통찰력이 담긴 책이다. <원은 닫혀야 한다>로 번역된 이 책은 생태계(ecosystem)보다 더 광범위한 생태권(ecosphere)이라는 낱말을 쓴다. 그만큼 사유의 폭이 넓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개념을 가장 먼저 제기한 저자가 제시하는 생태권의 네 법칙은 새겨 들을 만하다. ▶제1법칙: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다. ▶제2법칙: 모든 것은 어딘가로 가게 되어 있다. ▶제3법칙: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 가장 낫다. ▶제4법칙: 세상에 공짜 따위는 없다. 이 중에서 쓰레기 문제와 가장 직접 관련되는 것은 제2법칙이다. 모든 것은 어딘가로 가게 되어 있으니 슬러지(sludge), 찌꺼기, 폐기물 등의 쓰레기를 마구 몰래 버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가게 되어 있다. 이 제2법칙을 쓰레기통과 연관지을 수 있다. 길거리에 쓰레기통을 놓지 않으면 쓰레기가 줄 것이라고 여기는 건 책상머리 생각이다.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 생태권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쓰레기통을 놓아야 할 곳에 놓아야 한다. 모든 것은 어디론가 가게 되듯이 쓰레기통에 버려지지 않은 쓰레기도 결국은 어디론가 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통이 없으니 쓰레기통에 안버려질 뿐이지 살면서 쓰레기는 결국 나와서 어딘가에 버려진다. 쓰레기통을 놓지 않으면 쓰레기가 줄어든다는 주장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다. 쓰레기통이 없으면 무단투기되는 쓰레기, 그래서 사람들에게 짜증을 주지만 관심을 받지 못하는 쓰레기, 즉 구천을 맴도는 쓰레기들의 양을 늘리게 된다. 이에 알맞은 쓰레기통을 알맞은 장소에 놓는다는 뜻에서 적통적소(適桶適所)라는 사자성어를 짓는다. 길거리 쓰레기통 만이 아니라 내 집 앞에서도 적통적소해야 한다.
361. 12월 27일. 日. 서울. 대한극장에서 히말라야를 보았다.
쓰레기 보고서 열 한번째 정리
쓰레기 문제에 대처하는 적극적 방법
더 이상 나누어지지(divide) 않는(in) 개인(individual)이 모여 사는 집단이 인간사회다. 개미사회, 원숭이사회처럼 앞에 형용어 없이 사회라 하면 인간사회를 뜻한다. 일본인들은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에서 들어온 개념인 ‘society’를 사회(社會)라 번역했다. 이제 우리가 흔히 쓰는 일상어가 되었다.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가 아닌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 생태주의 공동체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놓여 있다. 이 점에 수긍하지 못할 수 있어도 세상은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좌우로 갈린 자본주의를 넘는 것이 생태주의이며, 단지 사람들 모여 사는 사회를 넘는 것이 사람들이 함께(common) 서로(mutual) 나누며 소통하고(communicare) 사는 것이 공동체(community)다. 생태주의 관점에서 사회복지는 공동체 복지로 전환된다. 공동체 복지란 나와 네가 속한 인간 사회 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속한 생태계, 생태권까지 생각하는 것이므로 생태복지다. 사회복지보다 더 넓은 공동체 복지, 즉 생태복지 차원에서 쓰레기 문제는 인간이 먹고 사는데 부수적 문제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생태가 되는데 핵심적 문제가 된다.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종량제 봉투처럼 국민에게 자잘한 비용을 전담하는 소극적 방법을 취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무상급식 비용을 정부가 부담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쓰레기 처리비용을 부담한다. 전국의 각 지자체는 쓰레기 문제 해결에 적극 대처하며 국민들의 쓰레기 분리배출에 적극 협조를 구하며 될수록 빠르게 분리수거한다. 무단투기 쓰레기 청소파업이나 무단투기자 적발 ‘쓰파라치’와 같은 꼼수 편법은 쓰지 않는다. 쓰레기 문제에 관해서는 ‘큰 정부’가 된다. 쓰레기 관련 행정의 역할과 책임이 커진다. 물론 이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민은 그 비용을 수평적으로 부담한다. 결국 생태 복지는 쓰레기(汚物) 복지다. 정부가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여 생태 복지를 이룬다는 뜻이다. 오물복지가 되면 사회복지도 자연 따라온다.
362. 12월 28일. 月. 서울. 병호의 농협 지점장 퇴임식에 갔다.
쓰레기 보고서 열 두번째 정리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 유연한 방법
매슬로우가 밝힌 욕구 5단계설을 시험볼 때 외워서 적었었다. 지금 생각하니 허접한 이론이었다. 인간의 욕구는 단계적으로 고상하게 높아지지 않는다. 인간의 욕구는 복합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생명체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식욕, 성욕, 수면욕과 같은 생욕(生慾), 물질적으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물질을 가지며 경제적으로 더 잘 살아 보겠다는 물욕(物慾), 사람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정치적 권력욕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애정욕이나 인정받고 싶은 명예욕 등의 인욕(人慾), 이 세 가지 생욕-물욕-인욕이라는 인간의 욕구는 따로 나뉘지 않고 겹쳐 있다. 욕망(慾望)과 욕구(欲求)의 명확한 구분도 혼동스럽다. 무언가가 결핍되어 요하고(need) 원하는(want) 욕심이 욕망이든 욕구이든 인간의 마음 속에는 온통 세 가지 본능적 욕구 만 있다. 생태적 욕구는 하나도 없다. 그러기에 생태주의 세상을 기대하는 것은 요원하며 불가능할 수 있다. 쉬운 예로 세제를 광고하는데 수질 오염을 적게 한다고 한다면 소비자의 마음을 끌지 못한다. 그냥 빨래를 깨끗하게 한다고 강조해야 팔린다. 인간의 본성이 그러할진대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쓰레기 분리배출 유도나 쓰레기 무단투기 자제를 위한 시민운동이나 캠페인을 벌인다고 할 때 아무리 강력하며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해도 실패한다. 시민들의 의식을 계몽하려거나 강요하려는 것도 실패한다. 넛지(nudge)적인 부드러운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억지로 그리 하려고 강하게 밀어붙이려는 것이 아니라 살짝 슬며시 그리 되도록 만들어야 효과적이다. 생생한 예로 남자화장실에서 소변기 밖으로 오줌을 흘리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소변기 안에 파리 한 마리 그려 넣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런 쪽으로 빅아이디어를 발휘해 크리에이티브하게 접근해야 문제가 풀린다. 이에 종심창유(從心創柔)라는 사자성어는 강요나 설득당하기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따라 창의적이며 유연한 방법을 쓰자는 뜻이다.
363. 12월 29일. 火. 서울. 광화문 부산은행 지점에 갔다.
쓰레기 보고서 열 세번째 정리
깨끗함을 이루어 갈 수 있는 방법
세계사에 ‘대혁명’이라고 이름지어진 혁명은 딱 두 개밖에 없다. 프랑스대혁명과 문화대혁명이다. 두 대혁명은 양상이 정반대로 전개된다. 프랑스대혁명(1789~1794)은 태양왕 루이14세, 15세로부터 이어진 왕권정치에 반발하여 루이16세를 몰아내는 자발적 시민혁명이었다. 하지만 혁명 이후 더 강력한 황제인 나폴레옹이 즉위하며 실패로 끝났으나 나폴레옹 3세를 거치면서도 시민사회가 정립되어 갔기에 길게 보면 성공한 혁명이다. 문화대혁명(1966~1976)은 권력천재 마오쩌뚱이 권력을 다시 쟁취하기 위해 어린애들을 동원하여 벌인 강압적 권력자 혁명이었다. 마오쩌뚱은 다시 강력한 권력을 차지하였기에 성공한 혁명이었지만 중국의 전통문화를 온통 황폐화시킨 혁명이었기에 길게 보면 실패한 혁명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면 문화대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이제 제3의 대혁명이 절실하다. 혁명의 주된 이념은 생태주의다. 혁명의 이름은 미감대혁명이다. 아무리 풍광이 멋진 곳이라도 아무리 예쁘게 꾸며도 쓰레기가 널려 있으면 아름다울 수 없다. 아름다움, 즉 미의 기본은 깨끗함이다. 아름다워서 깨끗한 것이 아니라 깨끗해서 아름다운 법이다. 우리 생활 전반 주변 곳곳에 쓰레기를 없애고 깨끗함을 이루어 가는 일이 미감대혁명이다. 혁명(revolution)보다 어려운 것이 개혁(innovation)이라는데 개혁보다 어려운 것이 변화(change)를 넘는 전환(changeover)이다. 전환은 지금 상태의 개선(upgrade)이 아니라 지금 상태에서 벗어나 축을 달리하는 일(paradigm shift)이다. 생태주의 삶으로의 전환에 따른 미감대혁명의 실천 주체는 시청, 구청, 동사무소 등 정부, 신문 방송 등의 언론사, 초중고등대학교, 사회복지기관, 시민사회 및 마을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다. 이를 통해 깨끗해서 아름다운 미적 쾌적감(amenity)의 공동체 사회를 이루어 가자는 것이 미감대혁명이다. 사자성어로는 미감대혁(美感大革)이다. 미감을 위해 크게 갈아 치우자는 뜻이다.
364. 12월 30일. 水. 서울→분당. 아버지 수술 간병하다.
쓰레기 보고서 열 네번째 정리
쓰레기를 총체적으로 경영하는 방법
쓰레기는 인간 사회의 부분적, 부수적, 일시적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 핵심적, 지속적 문제다. 경제가 돌아가는데 쓰레기는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다. 경제는 생태와 부(負)의 관계다. 경제성장이 커진 만큼 쓰레기가 많이 나오게 되며, 생태는 그 짐을 떠맡는다. 경제성장 만 추구하고 생태유지를 무시한다면, 균형과 조화가 깨지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깨지면 돌이키기 힘들다. 경제를 포기할 수 없다면 동시에 경제의 중요성만큼 쓰레기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으면 무리다. 경제 선진국 만이 아니라 생태유지 및 쓰레기 관리 선진국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최근 구청의 청소행정과가 자원순환과 등으로 명칭을 바꾼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좀 더 쓰레기 문제를 총체적, 복합적, 전반적, 포괄적 차원에서 다룰 필요가 크다. 총체적 폐기물 경영본부로 명칭과 사명을 바꾸면 어떨까? 청소행정과가 쓰레기를 단순히 처리하는 수준이라면, 자원순환과는 버려진 쓰레기를 청소하여 재활용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수준이다. 여기서 축을 달리 하여 총체적 폐기물 경영본부란 바다로 땅으로 하늘로, 고체로 액체로 기체로 버리는 온갖 쓰레기들의 처리 및 재활용 관리를 포함하여 경제성장의 카운터 파트로 동등하게 부각시켜 둘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경영하자는 뜻이다. 여기서 경영이란 영리 추구 경영이 아니라 관리보다 큰 경영을 뜻한다. 또한 일개 과 단위의 부서가 아니라 업무 영역을 확장시켜 본부로 승격하자는 뜻이다. 이 본부가 쓰레기 문제에 관한 총체적 머리(headquarter)가 되어 전국가적 쓰레기경영시스템을 작동시키면 어떨까? 이를테면 총체적 폐기물 경영본부다. 여기서 쓰레기 처리공학과 폐기물 관리산업에 관한 총괄업무를 하면 어떨까? 쓰레기 문제를 단지 일개 청소의 문제로 협소하게 여기지 않고 총체적으로 해결하자는 뜻이다. 이에 총기물영(總棄物營)이라는 사자성어를 짓는다. 경제 문제처럼 중요한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체적으로 쓰레기 폐기물을 경영하자는 뜻이다.
365. 12월 31일. 木. 분당. 불곡산에 올라 광주(廣州)로 내려갔다.
쓰레기 보고서 열다섯 번째 정리
아직 행사될 수 없지만 행사될 생각
사람들은 쓰레기라는 단어조차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1년 365일 매일 쓰레기란 낱말이 들어가는 글이 남들 보기에 결코 좋아 보일 리 없다. 그래도 꿋꿋히 쓰레기에 관한 글을 쓰고 싶고, 쓸 수 있고, 써야 해서 써왔다. 잘 팔릴 책도 아니다. 다만 쓰레기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할 의욕이나 능력도 없기에 불가능하지만 정치인이 된다면 쓰레기 문제해결에 초점을 맞추어 정치할 것이다. 이스턴(David Easton, 1917~2014)은 정치를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 정의했다. 한정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인 경제의 정의에 걸맞는 기막힌 정의다. 나는 더 직설적으로 정치를 ‘이상적 생각의 세력적 실행’이라 정의한다. 자기의 이상적 생각대로 행사하려면 세력이 있어야 한다. 세력화를 통해 지배권(hegemony)은 물론 정당성(legitimacy) 있는 정치권력의 행사가 가능하다. 이를 위해 선거판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싸우지만 과거에는 총칼로 죽고 죽이며 싸웠다. 그만큼 정치는 인간 본성이 드러나는 격렬한 전쟁터다. 정치인이 아닌데도 정치 얘기를 하면 늘 시끄러운 싸움이 되는 이유다. 꼭 국회가 아니더라도 인간사회나 조직에는 늘 정치가 있다.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 정치라지만 무엇이 바르냐에 대해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르므로 정치활동에는 갈등과 분란이 있다. 서로들 판단과 구상, 이상과 생각이 다르기에 실행하고 싶은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생태주의 이상에 따라 쓰레기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가 실행되려면 이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쓰레기 문제해결을 위해 더 많은 자원을 배분토록 실행할 수 있다. 정치가 정책을 움직인다. 최종 총정리한 위의 생각들을 나 혼자의 힘으로만 실행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정치인이 세력을 얻어 생태주의 정치를 실행할 때 위의 생각들이 세력적으로 실행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요원하겠지만 아주 먼 세상 딴 나라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곧 불어 닥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