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똥파리>에 출연했던 이환 감독의 첫 장편영화 <박화영>은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이었던 독립영화다. 모 유튜버의 영화 소개 영상을 보고 홀린 듯 관람했다. 처음엔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의 영화이기에 잔인하거나 선정적인 내용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비행청소년’의 밑바닥을 너무나도 솔직하게, 그리고 자극적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어쩌면 당연했다. 게다가 무명 배우들이 등장인물 대부분인지라, 다큐멘터리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청소년을 주제로 하고 있는 영화가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이라는 점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 현실은 그만큼 암울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는 비유나 미적 아름다움, 추상적인 장면들을 동원하여 관람객의 상상에 맡기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인물의 정서와 상황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출연한 배우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덕분에 영화는 보는 내내 불편함을 감출 수 없게 완성되었다. 반복해서 나오는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하는 주인공의 대사는 점차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등장인물의 헤어스타일을 통해 과거의 모습과 미래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는 듯한 장면의 전환 또한 이 영화의 분위기에 큰 기여를 했다. 참고로 욕설이나 지저분한 장면을 매우 많이 연출했으니, 이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은 관람을 자제하는 편이 낫다.
주인공 무리는 고등학생이다. 주인공 박화영(김가희 분)은 친엄마에게 버림받고 자취 생활을 한다. 이곳에 소위 ‘질 나쁜’ 친구들이 찾아오면서 무리가 형성된다. 화영은 비행청소년들의 '엄마'를 자처하며, 자신이 피지배계층에 속하면서까지 그 무리에 속하려고 발버둥 친다. 어른들에게는 강한 모습을 보이지만, 친구 무리에서는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은 안타깝기도 하다. 어쩌면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아이들을 지켜주는 엄마’를 자처하면서 채워나갔을지도 모른다. 작위적인 말투와 행동들로 듬직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려 하지만, 친구들은 이런 화영을 이용하기만 한다. 허세를 부리려 쓰는 욕들과 과장스러운 목소리, 그리고 눈빛에서 다시 버려지지 않으려는 혼신의 노력을 찾아볼 수 있다. 영화 후반에 생기를 잃은 화영의 눈동자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박화영의 단짝이자 또래 그룹에서 가장 높은 위치로 그려진 은미정(강민아 분)은 무명 연예인이다. 무리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남자친구인 영재에게 학대, 데이트폭력을 지속적으로 당하지만 연애를 이어가고 있다. 결국 '엄마'인 화영 또한 자신이 영재의 화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뿐이다. 영재를 자극 시키는 용도로 쓰거나, 대신 학대를 당하게 하거나, 귀찮은 일들을 하게끔 유도한다. 화영은 미정에게 둘도 없는 버팀목이 되고 싶지만, 미정에게는 그저 도구다.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인상이 찌푸려지게 만드는 미정의 남자친구인 영재(이재균 분)는 하는 행동 하나하나 눈 뜨고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런 애들은 청소년법이 하루 빨리 개선되어 반드시 처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영재는 화영 무리에서 우두머리이며, 2인자 없는 독재를 하고 있다. 여자친구인 은미정에게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는 편이며, 은미정과 자신의 사이를 방해한다고 느끼는 건지, 박화영의 존재를 탐탁치않게 여긴다.
아무 생각없이 그저 해맑은 세진은 다른 등장인물보다 한 살 어린 화영의 집에서 지내는 가출청소년이다. 무슨 계기로 화영의 집에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영을 그저 부려먹기에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시로 화영의 화을 돋우거나 영재에게 구타와 학대를 부추긴다. 이후 화영과 미정에게 영재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리는 장면이 나오며, 화영에게 구타를 당한 후 사라진다.
영화는 주요인물인 화영, 미정, 영재, 세진 네 사람의 갈등을 중심으로 이어나간다. 세진이 사라진 후반부에는 나머지 세 사람의 갈등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미정과 화영은 돈을 벌기 위해 성매매를 시도하고, 영재가 합류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예상했을지도 모르지만, 살인죄는 당연하게도 화영이 뒤집어쓴다. 먼 훗날 출소하고 식당에서 일을 하던 박화영과 은미정은 재회한다. 그러나 미정은 과거의 그 사실을 잊은 척 행동한다. 성인이 된 미정과 화영의 재회 장면에서 보이듯, 결국 미정도 화영을 이용하려고 단짝행세를 해왔다는 점이 너무도 잔인하고 슬프게 다가왔다. 미정과 인사를 나눈 화영은 새 삶을 사는 듯 했으나 결국 또 다른 비행청소년들의 ‘엄마’가 되어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청소년법이 하루 빨리 개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편한 영화였지만, 대체로 악역이 개과천선하여 미화되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가 많다. 하지만 이 영화는 모두를 끝까지 ‘나쁜 놈들’로 그려냈다. 불량청소년이라는 이름의 범죄자들을 미화하거나, 동정심을 유발하는 장면이 전혀 없었다.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했다.
화영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지우기 위해 엄마 역할을 자처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았더라면, 박화영의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고, 당연히 영화의 결말도 바뀌었을 것이다. 아무 죄책감 없이 살아가는 비행청소년들은 어쩌면 청소년기의 추억거리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단순한 추억정도로 여기고 넘어가는 그들을 보면 현실이 더 영화 같은 느낌이다. 영화 속에 등장했던 범죄들 보다 더 심각한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일까.
현실의 ‘박화영’들은 과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물론 화영이 잘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부모’에게 버림받아 생긴 빈자리를 엄마의 역할을 통해 채우려는 그녀의 모습이 안타깝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았지만, ‘박화영’으로는 살지 못했던 그녀에게 그동안 수고했다고, 위로 한마디 정도는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