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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 호칭은 사양…‘혐견권(嫌犬權)’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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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 호칭은 사양…‘혐견권(嫌犬權)’을 허하라
  • 편집국장 강동수
  • 승인 2017.10.2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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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수의 자투리시사인문⑯: ‘애완견 상해치사사건’으로 풀어내는 개 이야기
편집국장 강동수
1. 오늘은 가벼운 옛날이야기로부터. 어릴 적에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다. 어느 마을에 한 사내가 살았것다. 어느 날 지나가던 스님이 이 사내의 관상을 보더니 혀를 찼다. 왜 그러시느냐고 재우쳐 물었더니, “아무 날, 아무 시에 소뿔에 받혀 죽을 팔자이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거다. 해서, 이 사내는 그날이 되자 집에 있던 소도 밖으로 내보내고 대문을 걸어 잠그고는 방안에 틀어박혔다. 더운 여름날이라 땀이 줄줄 흘렀다. 이 사내가 장지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귓속이 가려워져서 귀이개로 귀를 긁어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닥쳐 장지문이 쾅 닫히면서 사내의 팔을 쳤다. 졸지에 귀이개가 귀를 콱 찔러 사내는 피를 쏟고 죽었는데, 그 때가 스님이 말한 바로 그 시각이고, 귀이개는 소뿔을 깎아 만든 것이더라는 이야기. 허무하달까, 억울하다고나 할까 제 팔자를 피하지 못하고 비명횡사하고 만 셈인데, 이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얼마 전 가수 최시원 씨의 애완견에게 무릎을 물려 죽은 이웃 사람의 이야기 때문이다. 집에서 풀려나온 개가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뛰어들어 느닷없이 사람을 물었다. 물린 사람은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이로 따지면 소뿔 귀이개에 귀를 찔려 죽고만 옛이야기 속의 사내보다 더 억울한 죽음을 했다고 할밖에. 유족으로선 땅을 칠 노릇이 아닌가. 하고 보면, 역시 10대 때 읽은 오래 된 단편소설 하나도 떠오른다. 오래 전에 타계한 소설가 황순원이 쓴 <링반데룽>이란 소설이다. ‘링반데룽’은 독일어인데, ‘링(Ring)’은 ‘원’을, ‘반데룽(Wanderung)’은 ‘방황’, 혹은 ‘방랑’이란 의미다. 조난당한 등산객이 동일한 지점에서 일정한 장소를 원을 그리며 계속 방황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는 분명 직진한다고 믿고 걸었는데 한참 후 돌아보니 원래 출발한 그 자리에 서 있는 거다. 그렇게 뱅뱅 돌다가 결국엔 눈보라에 지쳐 죽게 된다. 등산가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링반데룽, 즉 원형방황, 혹은 환상방황(環狀辗转反侧)이다. 이 소설은 작중 화자가 공수병(광견병)으로 죽어가는 친구를 병문안하면서 느낀 상념을 풀어낸다. 멀어진 애인과의 재회를 꿈꾸지만 제자리만 맴돌 뿐인 링반데룽 상태를 안타까워한다는 줄거리. 읽은 지 수십 년이 된 이 소설에서 정작 잊히지 않는 장면은, 기르던 개에게 손을 물린 지 한 달쯤 후 공수병에 걸려 의식을 잃은 채 종내는 죽음을 목전에 둔 친구에 대한 묘사다. 친구의 아내는 작중 화자에게 이렇게 탄식한다. “집에서 기르는 개 한 마리 때문에 남편이 죽게 됐으니 세상에 이렇게 허망할 데가 어디에 있겠어요.” 어쨌거나, 이번 사건이 터지자 애완견(어떤 사람은 ‘반려견’이라고도 부르지만)의 위험성에 대한 국민 여론이 폭발적이다. 맹견에게 제대로 목줄을 매거나 입마개도 하지 않고 거리나 공원으로 끌고 다니는 사람들의 무신경에 대한 성토 여론이 이는가 하면, 개가 싼 똥을 치우지도 않는 일부 매너 없는 견주들에 대한 비난도 거세다. 나아가, 정부 차원에서 견주들에 대한 규제나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소리도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건강보험공단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3년부터 최근 5년간 개에게 물려 피해를 본 사람은 561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들에게 들어간 병원 진료비는 10억 6000만 원이 넘었다고. 이건 공식적인 병원 치료를 받은 사람에 대한 통계이고, 지난 한 해 동안 개가 지나가던 행인 등을 무는 사고는 2111건이 신고 됐다고 하니, 일회성 해프닝으로 웃고 넘어갈 일만도 아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1000만 명을 넘었으니 갈수록 애완동물에 피해를 입는 사람 숫자가 더 늘어날 게다.   2. 개는 이리나 자칼(jackal) 등이 조상이라는데, 오스트레일리아에 야생하는 딩고(dingo)나 남아시아에 반야생 상태로 서식하는 개와 흡사한, 절멸된 야생종에서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인간의 손에 순치돼 가축화된 것은 1만 400여 년 전의 일이라니 인류의 오랜 동반자라 할 만하다.
딩고(구글 무료 이미지)
개가 인간에게 사육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페르시아의 베르트 동굴의 것으로 BC 95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산된다. 뒤를 이어 BC 9000년경의 것으로 추산되는 독일 서부의 셍켄베르크 개가 있는데, 크기와 두개골의 형태가 오스트레일리아의 딩고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신석기시대에는 몇 품종이 사육되었는데, 최초의 가축화는 적어도 제4빙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게 학계의 연구 결과다. 어쨌거나 포유류 중 가장 오래된 가축으로 거의 전 세계에서 사육되며 약 400여 품종이 있다고. 개는 오랜 세월을 통해서 가축으로 순치됐기 때문에 형태의 변화가 심하고 그 분포도 세계적이다. 품종에 따라 크기가 매우 다양해 어깨높이는 8∼90㎝, 몸무게 0.4∼120㎏의 편차를 보인다. 털도 긴 것과 짧은 것이 있고, 빛깔이나 무늬도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꼬리는 비교적 짧고 몸통길이의 반 이하이며, 귓바퀴는 크고 거의 삼각형으로 늘어진 것, 선 것 등이 있으며 앞으로 늘어뜨리면 눈까지 내려온다. 입술이 두툼하고 끝이 뾰족하지 않으며 비근부(鼻茎干)에서 안간부(眼間部)에 걸쳐 뚜렷한 단(段)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이리와 형태적으로 대단히 흡사하다. 앞발에 다섯 개의 발가락과 뒷발에는 네 개의 발가락이 있다. 몸통의 피부에는 땀샘이 없기 때문에 호흡으로 체온조절을 한다. 본래 육식성이었으나 가축화되면서 잡식성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빨은 식육동물처럼 날카롭고 강하나 위·장 등의 소화기관은 초식동물에 가깝다. 개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미의 젖을 냄새로써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후각이 예민하다. 이와 같이 발달된 후각으로 성별이나 개체 등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에 범인 추적을 목적으로 하는 경찰견이나 수색견으로도 이용된다. 청각 또한 발달돼 사람은 2만의 진동수를 겨우 들을 수 있으나, 개는 10∼70만의 진동수를 들을 수 있고, 소리의 가락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서 훈련을 받을 수 있다. 어두운 곳에서 사물을 잘 볼 수 있고, 움직이는 물체에 예민하게 반응하므로 야행성의 특징을 가지며 경계심이 강하다. 야생 개는 짖지 않으나, 가축화된 개는 기쁘거나 슬프거나 경계할 때에 짖는다. 그토록 오래 인간과 함께 살아온 만큼, 개에 관한 설화나 예술 작품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기원전 1000년경 이집트 벽화나 바빌로니아 예술품에 현대의 마스티프나 그레이하운드 닮은 개가 등장한다. 비슷한 시기에 아시리아 수도 니느베의 테라코타 유물에서 현존하는 싸움개인 마스티프(Mastiff) 닮은 개들이 군인들과 함께 싸움터에 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기원후 1세기에 로마의 정치가이며 박물학자인 플리니우스는 개를 여섯 가지 종류로 구분했는데 집 지키는 개, 목양견, 조렵견, 군견, 후각 사냥개와 시각 사냥개로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다.
마스티프(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개는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등장한다. 하데스의 지하세계를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는 반인반사의 괴물 에키드나와 전능한 신 제우스를 괴롭힌 괴물 티폰 사이의 아들. 머리가 3개 달렸는데, 지하세계 즉 저승의 입구에서 죽어서 지하세계에 들어온 영혼이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살아있는 사람이 지하세계에 들어가는 것도 막는다. 북유럽 신화에도 펜리르란 거대한 이리, 태양을 집어삼키려는 늑대 스콜, 달을 삼키려는 늑대 하티 따위 개과의 짐승들이 등장한다.
머리가 두 개인 BC300-400년경의 케르베로스. 네덜란드 국립박물롼 소장(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내 개인적으로는 서양미술에서 가장 인상적인 개의 그림은 프란시스 고야의 <개>를 꼽는다. 모래 폭풍이 누렇게 이는 검은 언덕 위로 개 한마리가 머리만 내밀고 있는 장면인데, 풍경은 고독하고 황량하다. 어떻게 보면, 인류 문명이 절멸한 후 마지막 생존자인 개의 모습을 그린 것 같기도 하다. 인류의 파수꾼인 개가 인류의 소멸 이후에도 지구의 모래사막을 떠돌아다니는 모습이랄까, 묵시록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고야의 그림 <개>(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3. 서양 사람들만큼 개를 다양하게 활용하진 않았지만 동양 사람이라고 개와의 친분(?)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개는 한자로는 대개 견(犬)·구(狗)·술(戌) 등으로 표기된다. 큰 개는 오(獒)와 방(尨)이라 불렀고, 보통 크기의 개는 견(犬), 작은 개는 구(狗)라 불렀다. 방(尨)은 ‘클(大) 방’이란 뜻 외에도 털 긴 삽살개라는 의미도 있었다고. <설문해자>에선 다리가 긴 개를 '犬'이라고 했다. 기(猉)·교(狡) 등은 작은 개를 뜻한다. 중국 지배층에 의해 애완용으로 길러졌다는 작고 털이 긴 개들은 중국의 최초 고대국가의 등장과 함께 한 셈이다. 당나라 현종이 애완했다는 황금사자개 페키니스, 시추 같은 개들이 대표적 중국 애완견들이다. 중국에는 이외에도 단모 애완견인 퍼그, 머리에만 털이 있고 온몸은 무모종인 차이니스 크레스티드 독 같은 희귀 견종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 지배층에서 애호하던 소형 애완견들이 수입돼 서울 장안의 권문세가에서 이들을 길렀던 모양이다.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페키니스(pekingese)를 닮은 발발이 같은 개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의 그림에 나오는 주둥이가 뾰족한 작은 개는 중국 혈통의 애완견들과 비슷한 모양이다. 외형 특징에 따라 지칭하던 이름으로는 삽살개, 바독개(바둑이), 발발이 정도가 있었다.
페키니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진돗개가 대표적인 우리 토종개이지만, 많은 개들이 독립된 품종으로 남지 못하고 해방 후 서양 문물의 도입과 더불어 혈통이 뒤섞이면서 멸종돼 버린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특히 또 다른 대표적 토종개인 삽살개의 경우가 그렇다. 삽살개는 털이 긴 게 특징인데, 특히 머리의 털이 길어서 눈을 덮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몸놀림이 기민해 운동신경이 잘 발달된 이 개는 큰 머리가 사자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사자개'라고 부르기도 했다. 서기 400년경 고대신라 때부터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길러 오다가 통일신라가 망하면서 민가로 흘러나와 고려나 조선 때에는 서민적인 개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원피주식회사에 의해 군용 모피자원으로 남획됐고,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그 수가 급격히 줄어 멸종단계에 이르게 됐다. 최근엔 다시 복원사업이 펼쳐져 '경산의 삽살개'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제368호로 지정됐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1743년 김두량이 그린 삽살개(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우리 민족에게 개는 주인을 잘 따르고 주인이 위험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 구하는 등 충직함의 상징이다. 오죽하면 절개를 굽히거나 은혜를 잊은 사람을 일러 ‘개만도 못한 놈’이라 불렀겠는가. 고려 후기 최자(崔滋)가 엮은 시화집인 <보한집(補閑集)>이나 조선시대의 <청구야담(靑丘野談)>엔 주인을 위해 죽은 개의 무덤에 관한 설화가 실려 있기도 하다. <청구야담>에 실린 이야기는 이렇다. 주인이 장에서 술을 먹고 돌아오다 풀밭에서 잠이 들었는데, 산불이 나자 개가 꼬리에 물을 적셔 주인의 주위에 뿌렸다. 주인이 나중에 깨어보니 개가 불에 그을려 죽어 있었다. 그래서 주인은 개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4.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나는 애완동물 키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고양이나 개를 길러본 적이 없다. 딱 한 번 애들이 아주 어릴 때 하도 성화를 부려 베란다에 햄스터를 키워본 적이 있는데, 어미가 제 새끼를 잡아먹은 것을 알고는(스트레스 받으면 그러기도 한다는 건 나중 알았다) 만정이 떨어진 적도 있다. 그러니 동물을 학대해 본 적도 없지만, 애완동물에 유난(?)을 떠는 사람들의 정서도 속속들이 이해하긴 어렵다. 그래서 개를 안고 다니면서 개더러 자신을 엄마라고 지칭하며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은 일단 물끄러미 쳐다보게 된다. 한 번은 어떤 분이 나더러 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느냐기에 “저는 집짐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라고 무심코 대답했다가 한참 나를 빤히 쳐다보기에 당황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개더러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것처럼 그이는 ‘반려견’을 ‘짐승’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내가 매우 낯설었던 모양이다. 글쎄, 뭐 인간이 인간 같지 않은 세상에 개나 고양이에게 마음 붙이고 사는 사람이 적지 않은 건 잘 아는 바다. 귀엽게 콩콩거리고 자기를 보면 좋다고 펄쩍펄쩍 뛰어주는 동물들이 훨씬 더 살갑고 가족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긴 하겠다. 하고 보면 애완(愛玩)이란 말 자체가 ‘아끼고 희롱한다’는 뜻인데 그 동물의 편에서 보면 수천, 수만 년 인간에게 순치를 당해 야성을 잃고 인간의 손바닥 안에서 희롱거리가 되는 제 팔자가 그렇게 좋기만 할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개를 끌고 다니는 건 좋다 쳐도 여기 저기 똥을 퍼지르게 하거나 길 가는 사람 놀라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얼마 전, 쉬는 날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동네 앞 가게에 뭘 사러 나갔다가 신호등 앞에서 하마터면 개에게 종아리를 물릴 뻔 한 적도 있다. 축구공만한 놈이 느닷없이 내게 달려드는 거다. 깜짝 놀라 펄쩍 뛰어 피하고는 주인인 젊은 여성을 노려봤는데 주인은 못 본 체 딴청을 하는 것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반려견(伴侶犬)이란 표현을 쓰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반려’는 사전엔 ‘짝이 되는 동무’로 풀이돼 있지만 원래 아내나 남편 같은 배우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인생의 반려자’란 말은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붙이지 않는, ‘일심동체’인 배우자에게 쓰는 특별한 호칭이 아니던가. 언어라는 게 사회성이 있고 시대에 따라 그 뜻이 바뀌는 생물과 같은 존재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가 아무리 귀엽다 해도 짐승에게 붙일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나는 행여라도 개나 고양이를 내 아내로 삼을 생각이 없다. 걸핏하면 ‘국민 배우’, ‘국민 사위’ 식으로 ‘국민’을 갖다 붙이는 언어 습관처럼 쓸데없이 말을 인플레이션하는 것은 자제돼야 옳지 않나. 말값이 헐해지면 도리와 역할의 구분이 없어지는 거다. 아차차, 잡설이 길어졌다. 어쨌거나, 매리 루이스 드 라 라메가 쓴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파트라슈’처럼 충직의 상징인 개가 사람을 해쳐서 세상 인심이 끓고 있으니 딱하다. 개를 키우는 이들도 곤혹스럽긴 할 거다. 개가 사람을 물면, 개 주인이 문제이지 개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항변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개는 개이지 인간일 수는 없지 않나.
동화책 <플란더스의 개>의 삽화(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다중이 모이는 장소에서 담배 연기를 거부하는 혐연권(嫌煙權)이 정착한 지 오래다. 흡연권보다 혐연권이 우선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다중이 모이는 장소에서 개에게 물리지나 않을까, 재수 없이 개똥을 밟을 수도 있지 않을까 불안해하지 않을 권리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개에게 물리는 사고가 연간 수천 건이나 되고 급기야 죽는 사람까지 더러 생기니 하는 말이다. 정부도 개의 사육이나 관리에 따르는 책임을 엄격히 하는 법제화를 서두를 필요가 있을 게다. 1822년에 세계 최초로 동물보호법을 제정한 영국이나 2002년에 세계 최초로 헌법에 동물권을 명시한 독일에서도 맹견을 키우려면 법원의 허가를 얻도록 하거나, 개가 사람을 물어 죽인 경우, 견주에게 징역형을 살리는 등 규제책도 강력하다. 개를 외출시킬 때 목 끈을 매고 입마개를 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면 대인 배상 보험 가입 등을 의무화할 필요도 있겠다. 동물을 학대하는 행위는 규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동시에,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권리도 존중받아야 할 터. 나아가 불안에 떨지 않을 권리도 중요하다. 어쨌거나,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나 키우지 않는 사람이나 서로의 권리를 누리면서 쾌적하게 지낼 수 있도록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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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달 2019-04-18 21:40:52
그러면 혐연권도 았고 혐견권 애견권도 있는대 좆혐권은도 익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