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山川依舊)란 말 옛 시인의 허사(虛辭)로고
예(여기)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려
어릴 때 즐겨 부르던 노래다. 9월 8일은 한국 특유의 24절기 중 하나인 백로(白露)다. 밤에 기온이 떨어지면서 풀잎에 하얀 이슬이 맺혀 백로가 된다. 가을 기운이 완연하다. 너른 들판에 오곡백과(五穀百果)가 무르익어가고 길가에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며 가을을 손짓한다. 가을이 오는 길목이 살며시 열리고 있다.
이맘 때 내 고향집 뒷뜰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리고 한냇가 과일밭에는 사과가 붉게 영글어 간다. 어머니의 붉디붉은 그 사랑이 감처럼 사과처럼 지금도 숨쉬고 있다. 다가서면 꿈이런가 따뜻한 그 손길은 다시 잡을 길이 없다. 그 백로가 내 눈에 '이슬'로 맺힌다. 열흘 남짓이면 겨레의 큰 명절 추석(秋夕)이다. 고향길을 재촉하여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을 만나고 싶다. 마을 옛 서산 쪽 큰 소나무 가지에 내 세분 누님과 동네 누이들이 타던 그네줄에 매달려 노래라도 불러봐야겠다.
100여 가구가 살던 내 고향 마을엔 이제 60여 가구만 산다. 그래도 한두 명 남은 친구도 보고, 큰집 형수와 아이들 만날 수 있으니 아직은 고향길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영원한 노스텔지어(nostalgia)가 먼 꿈처럼 스민 고향, 개발과 성장이란 이름으로 고향산천을 허무는 일이 더 이상 없어진다면 우리에게 얼마나 밝고 큰 희망인가. 어제 일본 홋가이도(北海島)에 느닷없는 강진과 산사태로 한 마을이 통째로 흙더미에 파묻혀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산을 잘 가꾼 일본도 자연재앙을 피할 수 없었는데, 그렇지 못한 우리는 더욱 경계하지 않으면 그보다 더 큰 자연의 보복을 스스로 몰고오게 된다. 고향은 어머니의 한없이 넓은 품으로 오래 우리들 곁에 머물도록 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쩌면 우리가 오늘 편하게 누리는 이 현대의 문명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