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형법정주의’라는 말이 있다. 이는 범죄와 형벌은 미리 법률로써 규정해야 한다는 의미로 ‘법률이 없으면 처벌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범죄와 이에 대한 형벌이 법률로써 적시돼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각종 신종 범죄가 늘어났다. 그러나 이를 처벌할 마땅한 법률이 없어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피해자는 이중의 고통을 겪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법 규정이 기술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는 딥페이크(deepfake) 기술은 인공지능 기술 중 안면 매핑 (facial mapping) 기술을 활용해 특정인의 얼굴, 신체 등을 다른 영상에 합성한 편집물을 말한다. 이 기술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선거 때 후보자의 얼굴을 활용한 가짜 뉴스 영상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 봤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특정 여성의 얼굴을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음란물에 바꿔 넣는 ‘딥페이크 포르노’가 음지에서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
언론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사이버 보안 연구업체인 ‘딥트레이스’가 지난 9월부터 딥페이크 영상이 유포되는 사이트를 분석한 결과 96%가 포르노물이고, 이 동영상 속 여성 얼굴의 25%가 한국 연예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이미 딥페이크의 안전지대에서 한참 벗어났다는 얘기다. 하지만 딥페이크 기술을 악용했을 때 이를 처벌할 법은 아직 국내에 마련되지 않았다.
나는 딥페이크 포르노를 제작·유포한 사람은 성폭력처벌법에 근거해 성범죄자와 동일 선상에 취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딥페이크 포르노는 피해자의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성범죄 행위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우리나라에서 허위사실적시 사이버 명예훼손죄나 사이버 음란물유포죄로 형사처분하고 있을 뿐 딥페이크 포르노 범죄에 성폭력 처벌법을 적용하기란 어려움이 따른다. 현행법은 딥페이크 포르노가 피해자의 신체 특정 부위를 직접 촬영한 것은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성폭력처벌법에서 규정하는 ‘촬영물’의 범위에 엄격한 기준을 두고 있다.
이와 관련된 대법원의 판례(2017도3443)를 들어보겠다. 유흥주점에서 일하던 A 씨는 손님으로 찾아온 유부남 B 씨와 내연관계를 맺었다. 그러다 B 씨가 이별을 고하자 A 씨는 합의하고 촬영해둔 자신들의 성관계 동영상 파일 중 한 장면을 휴대전화로 찍어 B 씨의 아내에게 전송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성폭력처벌법 제14조는 촬영의 대상을 '다른 사람의 신체'로 규정하고 있다"며 "따라서 다른 사람의 신체 이미지가 담긴 '영상'을 촬영하는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즉 A 씨가 성관계 동영상 파일을 컴퓨터로 재생한 후, 모니터에 나타난 영상을 휴대폰으로 촬영한 행위는 피해자의 신체를 직접 촬영한 것이 아니므로 성폭력 처벌법이 규정하고 있는 촬영물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논리라면 딥페이크 포르노 역시 피해자의 얼굴을 포르노 영상에 합성했을 뿐 실제 피해자의 신체는 촬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폭력 처벌법에 근거해 처벌하기란 어려움이 따른다. 이에 대해 한국외대 법학연구소 소속 배상균 씨는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검토’라는 논문에서 “명확성의 원칙상 딥페이크 포르노가 촬영 개념에 포섭될 수 없다면 별도의 ‘영상합성⋅편집’에 대한 행위 유형을 부분을 구체화하는 방안이 요구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내 얼굴을 합성한 음란물이 인터넷에 버젓이 돌아다닌다면 어떨까? 인터넷에 한 번 유포된 영상을 영구적으로 완전히 삭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 속에서, 피해자는 평생 수치심을 떠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가해자를 잡는 것도 문제지만 설사 체포했다 하더라도 가해자가 성폭력 처벌법이 아닌 고작 사이버 명예훼손죄로 죄에 비해 가벼운 형량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할 것 같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딥페이크 기술이 악용될 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를 제대로 처벌할 수 있도록 딥페이크 전담 기관을 신설해 이를 처벌할 법 규정 신설을 서둘러야 한다. 별도의 법 규정을 마련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기존의 성폭력 처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촬영물의 범위를 피해자의 신체를 직접 촬영한 영상물에서 그 범위를 넓혀 영상 합성물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될 수 있도록 좀 더 유연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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