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착취를 경멸하고 계급혁명에 일생을 바쳤던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가 오늘날의 한국을 봤다면 “이 나라는 신분제 국가임이 틀림없다. 총체적으로 답이 없다”고 외쳤을 것만 같다. 민생법안 제쳐놓고 정당 싸움하느라 또다시 멈춰버린 국회를 보면, 분노 말고는 달리 느낄만한 감정이랄 게 없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단식 8일째인 지난달 28일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면서 단식투쟁을 멈췄다. 황 대표가 단식투쟁하는 내내 언론은 그의 표정, 건강 상태, 방문객 등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렇듯 정치인들의 단식은 세간의 관심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단식도 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최승우 씨는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 지붕 위에서 24일간의 단식 농성 끝에 지난 29일 응급실에 실려 갔다. 최 씨가 2년간의 국회 앞 노숙농성에 이어 지붕 위로 올라가 단식투쟁을 이어나간 이유는 단 하나, 형제복지원 진상 규명을 위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일부 개정 법률안’ 일명 ‘과거사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것이다.
최 씨는 14세 때 빵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5년간 형제복지원에 감금됐다. 형제복지원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당시 부랑아 선도를 목적으로 장애인이나 고아 등 3만여 명을 불법으로 납치해 강제노역·폭행·살인 등을 저지른 곳이다. 언론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이 운영된 12년간 공식 확인된 사망자 수만 551명에 달했고, 일부는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간 사실도 드러났다. 1989년 당시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은 재판에 넘겨졌지만, 건축법 위반과 업무상 횡령 혐의만 인정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국가에 의해 피해자가 발생한, 국가가 책임지고 보상해야 할 대상이 명백한 사건이다. 지난해 11월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은 형제복지원 피해자 30여 명을 만나 “인권이 유린당하는 사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며 눈물을 흘리고 사과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후 3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정부 차원의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도,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진행된 것이 없다. 과거사법이 4년째 국회에서 발이 묶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법안이 계속해서 통과되지 못하고 국회에서 잠만 자고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자유한국당이 법안 통과를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며 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29일 기자들과 만나 과거사법을 행정안전위원회에서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는 것, 현재의 과거사법은 ‘불명확한 요건’이 있다는 것 등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어 통과시킬 수 없다고 얘기했다. 개인적으로는 나 대표가 과거사법을 행안위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는 얘기는 해선 안 될 얘기라고 생각한다.
지난 5월 과거사법 심사를 위해 열린 행안위 전체회의는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의원의 불참으로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무산됐다. 애초 이날 회의는 매월 둘째·넷째 주 화요일 법안심사를 하기로 한 여야 합의에 따른 것인데, 불참할 거면 합의는 왜 했는지 의문이다. 과거사법은 지난 10월 22일 열린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통과됐는데, 이날 역시 한국당 의원이 불참한 가운데 표결을 통해 이뤄졌다. 한국당 의원은 오지 말라고 막은 것도 아니고, 중요한 순간 번번이 회의장을 빠져나갔으면서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며 마치 한국당은 의견 제시 기회마저 없었다는 식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한국당이 과거사법을 달가워하지 않는 보다 구체적 이유는 정의당 추혜선 의원이 시사 프로그램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해 발언한 내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추진 중인 과거사법의 범위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비롯해 형제복지원, 성감학원 사건, 서산개척당사건 등 현대사에서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유린 사건을 포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추 의원은 “법안 논의 과정을 보면 가장 큰 쟁점이 진상규명 범위”라며 “한국당에서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만 포함하자. 현대사는 제외하자’(고 한다)”고 말했다. 한국당 주장대로라면 현대사에서 국가 주도로 일어난 폭력 사건, 즉 형제복지원 사건은 진상규명, 피해보상 대상에서 제외된다. 현대사에서 국가주도 민간인 폭력을 자행한 두 정권과 과거 뿌리를 같이 한 한국당이 왜 과거사법을 끝까지 저지하려 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대화와 타협이란 선의만 가지곤 국회를 정상 운영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지난달 29일 한국당이 199개 안건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것과 관련해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가 한 말이다. 여당 원내대표 입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국정 운영 못 하겠다”는 소리를 듣는 국민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국회에서 되지도 않는 정쟁 싸움을 계속하는 그간,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지붕 위에서 추위에 맞서며 굶고, 카메라 앞에서 수차례 상처를 되새김질하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과거사법이 시행되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자유한국당은 지금이라도 과거사법 통과에 적극 협조하거나 그러지 못하겠다면 반대하는 이유를 ‘불명확한 요건’이라는 모호한 단어 말고 구체적으로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
*편집자주: 위 글은 독자투고입니다. 글의 내용 일부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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