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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세계·한국언론 이슈-22] ‘상소’(上疏) 전성시대와 한국 권력·언론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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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세계·한국언론 이슈-22] ‘상소’(上疏) 전성시대와 한국 권력·언론의 책임
  • CIVIC뉴스 칼럼니스트 차용범
  • 승인 2020.11.29 1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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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지금 ‘상소(上疏) 전성시대‘다. ’진인(塵人) 조은산‘의 청와대 국민청원 ’시무(時務) 7조 상소‘는 국민들의 폭발적 호응을 얻으며 시대적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시무 7조’를 패러디한 ‘경상도 백두(白頭 김모(金某)’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에서, ’추미애 아들 특혜‘ 의혹을 풍자한 ’형조판서 단죄 상소‘류의 청원도 잇따른다.

상소, 왕에게 건의·청원·진정하는 문건이다. 공론정치라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형성하며, 정치참여를 확장하는 주요수단이다. 군주나 특정집단이 정국을 독점 운영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반론권이다. 이즘, 국민청원이 아니어도, 상소의 형식을 빌린 현실비판은 빗발친다. 조은산이 이낙연을 “얼굴은 하나요 입이 두 개인 기형생물”로 빗대어 말하듯.

당연히 상소를 올릴 신하·유생은 굳은 결심을 해야 했다. 유배를 넘어, 때로는 죽음까지 각오해야 했다. 그런 꼿꼿한 지조·강인한 기개와 확고한 소신 없이, 절대군주에게, 정국 운영에의 비판적 견해를 당당하게 직언할 수 있었겠나. 왕이 상소에 직접 비답(批答)으로 답한 것은 그들의 기개·소신에 대한 예의였다.

상소는 군주나 특정집단의 독단을 견제하기 위한 반론권의 하나였다(사진; 조선시대 상소, 선샤인 지식노트).
상소는 군주나 특정집단의 독단을 견제하기 위한 반론권의 하나였다(사진: 조선시대 상소, 선샤인 지식노트).

이즘의 ‘상소’ 전성현상을 보며, 옛 선비의 ‘품격 있는 풍류’을 보는 재미를, 말을 맘껏 못하는 사회에서 권력을 한껏 풍자하는 대리만족을 얘기한다. 국민 저항권 행사의 전조를 읽기도 하고. 그 상소, 예리한 비유·풍자를 넘어, 국민적 분노의 표출인 것이다.

결국, 이즘의 ‘상소’ 전성현상은 오늘의 소통위기를 대변한다. 한국정치의 불통현상과 언론의 진영논리적 양극화에 대한 반증이다. 오죽하면, 언론이 다양하지 못하던 시대, 그 언론의 중요한 형식(‘언론’이 조선왕조 500년을 일구었다)을 다시 소환하겠나.

국민들이 ‘상소’에 열광하는 이유? 어용 지식인과 '친여 언론'의 득세를 드는 분석도 있다. 상소라는 게 그저 풍자·해학의 영역에 머물 수만은 없지 않나. 때로는 ‘목을 걸고’, ‘피를 토하고 뇌수를 뿜는 심정으로’ 쓰는 정치적 의사의 극단적 표현일지니. 이 험난한 소통위기, 과연 누구의 책임이며, 누가 풀어갈 것인가?

‘진인’의 실정(失政) 풍자, ‘현인’의 준열한 권력 비판

1. ’塵人 조은산이 시무 7조를 주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니 삼가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평범한 30대 가장의 정부 실정(失政) 풍자 글이다. “나라가 폐하가 것이 아니듯, 헌법도 폐하의 것이 아니옵니다”-’시무 7조‘의 정부 비판은 사뭇 준열(峻烈)하다.

그 기세에 청와대도 놀랐나? 이 글을 한동안 감추다 여론의 비판 끝에 뒤늦게 공개했다. 숱한 패러디가 쏟아지며 신드롬급 인기를 끌어냈다. 진인(塵人), '먼지 같은 사람'을 자칭하고 '미천한 소인'으로 자기를 낮췄지만, 1만 3700자(字)가 넘는 '현인(賢人)'의 상소 속 의미는 크고 깊다.

‘진인 조은산’의 ‘시무 7조’ 상소는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실정(失政)과 인사 실패, 헌법 무시, 외교 무능 등을 조목조목, 절묘한 비유로 질타했다(사진; 국민청원 캡처).
‘진인 조은산’의 ‘시무 7조’ 상소는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실정(失政)과 인사 실패, 헌법 무시, 외교 무능 등을 조목조목, 절묘한 비유로 질타했다(사진: 국민청원 캡처).

‘시무 7조’는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실정(失政)과 인사 실패, 헌법 무시, 외교 무능 등을 조목조목, 절묘한 비유로 질타했다. 반향은 뜨거웠고, 패러디는 이어졌다. 림태주 시인은 '폐하의 대변인'인 양 갑자기 나타나 ‘진인 조은산’을 섣부른 논리로 나무라다, 되레 ‘진인’의 쇠망치 같은 몇 마디 반격을 받곤 황급히 물러섰고.

경상도 백두(白頭) 김모(金某)’의 "진인 조은산을 탄핵하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역시 결기며 풍자가 빼어나다. 제목만 보면 앞선 '시무 7조'의 '진인 조은산'을 비판하는 것 같다. 실은 대통령과 권력층을 질타하는 내용이다. ‘시무 7조’를 일일이 탄핵하는 문맥에, 절묘한 반전을 붙여 현 권력과 이낙연·조국까지, 죄다 때린 것이다.

“신하를 가려 쓰라는 주장에 대하여: 은산은 ‘조정에 총명한 신하를 쓰라고 주청하고 있으나, 이는 황상폐하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한 무지렁이 유자(儒子)의 혼잣말이라고 생각되옵니다. 폐하께서 신하를 발탁함에 있어 유일한 척도는 오로지 ‘내편이냐 아니냐’임을 온 백성이 알고 있는데, 은산 혼자서 총명한 신하를 쓰라면서 딴 소리를···.”

"폐하께서는 촉화봉기의 정신을 정치에 펼치시려고 취임사에서부터 '저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 모두 우리 국민으로 섬기겠다'고 반포하신 이래 온 백성으로 하여금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나라'를 골고루 경험하도록 배려해 주셨음은···" 같은 문맥은 또 얼마나 서늘한가. 정말 ‘세상은 넓고 고수(高手)는 많다’는 말을 실감한다.

상소, 국민 분노 정확히 짚으며 ‘권력독주’ 공감 넓혀

2. 이 상소들은 그 치열한 기개와 준열한 내용에서 역사 속 ‘십사소(十思疏)’를 떠올리게 한다. 조선 시대 성종 11년(1479) 직제학(直提學) 김흔(金訢)이 임금에게 올린 10가지 내용의 소(疏). “한 통의 상소로 본분을 다하고자, 만 번 죽더라도 성명(聖明)에 보답할 뿐이로다” 같은 결연함을 보라.

중국 당(唐)나라 위징(魏徵)이 태종(太宗)에게 올린 ‘십사소’도 있다. “하고 싶은 일에는 그칠 때를 생각해 백성을 편안케 하고(思知止以安人), 불통이 걱정되면 마음을 비워 간언을 들으며(思虛心以納下), 간사한 자가 우려되면 몸을 바르게 해 악한 사람을 물리치고(思正身以黜惡)....”

역시 역사의 명군(名君)은 간신(諫臣)이 만들었다. 마오쩌둥도 위징을 인용했다. “겸허히 의견을 들으면 현명해지고, 편벽되게 한쪽만 믿으면 아둔해진다(兼聽則明 偏信則暗)”(신경진).

신라말 최치원의 ‘시무십여조(始務十餘條)’에 나타난 나라에의 충성심은 그저 애닯다. 한 나라의 관리로서, 학문을 하는 선비로서, 무너져가는 나라를 그저 지켜보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목숨을 걸고라도 나라를 살리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계책을 마련해 간하는 것이 옳다···.

이즘 상소들이 드넓은 공감을 얻는 이유는 뭔가? 정부의 실정에 분노하면서도 표출하지 못했던 국민의 갑갑한 마음을 정확하게 짚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의 일방독주 등에 대한 분노와 피로감이 쌓이고 쌓여 한꺼번에 분출된 것이라는 평가도 있고. 두루, '저 말이 내가 하고 싶었던 그 말'이라며 공감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속 모를 침묵, 소통·통합 약속 외면?

3. ”대통령님, 어디에 계십니까. 사람 뒤에 숨지 마십시오“-‘시무 7조’ 상소 두 달 만에 청와대의 답변을 받은 조은산의 절규다. 43만 명이 동의한 ‘상소’에, ‘디지털소통센터장’의 이름으로, 형식적 답변을 내놓은데 대한 비판이다.

그는 거듭 간언한다. “국민은 각자 다르니 한곳에 몰아넣으면 안 된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고 지켜주는 것이 진정한 통합이다, 다르다고 외면할 것도, 밟아 없앨 것도 아니다, 그 접점을 찾고자 눈을 감아 고뇌하고 밤을 밝혀 신음하니, 대통령의 낮과 밤은 따로 없는 것이다···.” 그 애닯은 간언은 서늘하고 눈물겹다.

대통령의 ‘말 없기’가 그 뿐이랴. 북한군 서해 공무원 총격살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청원에도, 대통령은 그저 ‘평화의 절실함’만 얘기한다. 법무장관의 수사지휘·인사·감찰 권한남용에 따른 사회적 혼란이며 법무장관-검찰총장의 그 난장판 같은 대치상황에도, 대통령은 한마디 말이 없다.

‘진인’은 ‘형조실록’이라는 글에서 풍자한다. "검사는 검(劍)을 잃어 정처 없고 정치는 정(正.올바름)을 잃어 비정하니 공정은 공을 잃어 빌 공(空)이다. 민주는 민(民)을 잃어 스스로 주인이고 판서는 한낱 왕의 졸개로 전락하니 법치는 수치가 되었음에···". ‘진인’은 최근 첫 언론인터뷰를 통해 ‘커밍아웃’했다. ‘조은산’(Good Mountain)은 아명(兒名)이다.

언론의 권력감시 DNA+권력의 소통·통합 노력 절실

이즘의 상소에서 깨우쳐야 할 바는 뭔가. 국민들은 현실에의 분노와 답답함을 해소할 통로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치는 열광과 냉소 사이에서 극단적 대결로 치달으며 소통 공간을 좁혀가고 있다. 언로 역시 이념 프레임에 침몰, 소통 통로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결국, 국민들은 "피를 토하고 뇌수를 뿜는 심정으로" 격문(檄文) 같은 상소를 쓰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요즘도, 옛 ‘상소’를 자청한 청원이 잇따른다(사진; 청와대 국민청원 홈피 캡처).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요즘도, 옛 ‘상소’를 자청한 청원이 잇따른다(사진: 청와대 국민청원 홈피 캡처).

언론, 조선 선비 같은 지조·기개로 권력감시 근성 가져야

‘상소’가 각광받는 시대에, 우리 언론이 느껴야 할 바는 뭔가? 펜은 칼보다 무섭다 했고, 몇 방울의 잉크가 역사를 뒤집는다 했다. 잠시 권력에 굴복하기보다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겠다는 것은 붓 가진 자들의 공통적 사상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상소’를 쓰는 민초, 그 상소에 환호하는 국민을 보며, 언론은 정녕 무엇을 느끼는가?

어느 시대이든 언론은 조선 선비처럼, 꼿꼿한 지조·강인한 기개와 함께, 항상 권력감시에의 깨어있는 근성을 가져야 한다. 그 선비는 늘 절의(節義)를 지키며 권위에의 도전을 두려워 않았고, 많은 선비가 임금의 잘못을 논쟁하다 목숨을 잃었다. 적어도 언론이라면, 권력 앞에서도 대놓고 바른 말하는, 그런 DNA를 잃지 않아야 한다.

오늘의 소통위기 속, 대통령의 소명과 책임은 뭔가? 조은산의 간언이 아니더라도, 대통령은 첫 소명으로 ‘국민통합’을 다짐하지 않았나. ‘군림·통치하는 대통령’ 대신 ‘대화·소통하는 대통령’을 약속하지 않았나. 아무리 ‘말 없는 대통령’이라지만, 언제까지 국민들의 그 애타는 ‘상소’를 두고 볼 것이며, 그 상소에의 비답까지 외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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