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인류가 시도해 온 정치·사회체제 중 가장 성공적이다’-그 낙관론자들의 찬사는 이미 묵은 역사다. 최근 세계 곳곳에선 민주주의의 위기며 실패를 우려하는 경고들이 잇따른다. 민주국가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미래를 불안해할 때, 석학(碩學)들은 묻는다. ‘현대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질 것인가?’ 당장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태롭다. 민주국가 국민의 천부적 인권 ‘표현의 자유’부터 바람 앞의 등불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데이비드 런시먼(David Runciman) 교수는 현대 민주주의가 겪은 위기의 순간들을 분석하며 민주주의의 미래를 예측하는 ‘민주주의 전공’ 정치학자다. 그의 신간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신호들>은 그런 통찰 끝의 역작이다. 그는 최근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는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들을 주목하며, 불쑥 자문한다, ‘과연 이것이 민주주의가 최후를 맞는 방식일까?’
민주주의 위협하는 신호, 쿠데타-대재앙-정보권력...
런시먼은 민주주의의 종말을 세 가지 주제로 정리한다.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이다. 먼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명확한 신호, 쿠데타다. 민주국가에서 쿠데타는 노골적 국가전복 형태가 아닌, 은밀한 방식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행정부 쿠데타(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민주주의 유예), 공약성 쿠데타(선거를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은 이들의 민주주의 장악), 행정권 과용(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민주주의 체제 점진적 약화) 등이다.
다음, 대재앙. 핵전쟁, 기후변화, 생화학 테러 등이다. 남은 사람들이 생존투쟁에 몰두하느라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망각하는 것이다.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 역시 민주주의의 무력화를 부르는 예다. ‘정보권력.’ 급격한 기술발전에 따른 인간 소외와 민주주의의 왜곡 가능성이다. 독재자는 기술을 효율적으로 사용(악용)할 수 있다는 것, 그 기술은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결정적 무기이기 보단, 이들을 추적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정보권력’ 얘기는, 일찌감치 ‘빅브라더’의 등장을 예견하며 감시·통제의 디스토피아(dystopia: 역유토피아)를 경고한 조지 오웰의 생각과 닿아있다. 오웰이 소설 <동물농장>에서 역설한 언론자유의 가치, 소설 <1984년>에서 그린 권력자의 정보 왜곡·통제 상황과 같다. 런시먼은 <정치적 위선: 권력의 가면, 홉스부터 오웰까지>(2008)를 출판하며, 오웰의 정치철학을 살피기도 했고.
인간억압 체제와 ·정보 왜곡·통제 앞에 우린 당당한가?
런시먼의 ‘쿠데타’는 칼럼(“한국 민주주의는 건강한가?-‘민주주의의 위기신호’ 앞에서-”)에서 경고한 미국 민주주의의 위협신호처럼, 곧 한국의 현실이다. 그의 ‘정보권력’ 역시 칼럼(“언론의 자유, 언론개혁 논란, 조지 오웰의 경고”)에서 오웰이 경고한 대로, 곧 한국의 현재다.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과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대니얼 자블랫Daniel Ziblatt)의 근작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도 같은 흐름이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 직후, 전통을 자랑하는 민주주의조차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닫고, NYT에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는 칼럼을 쓴 결실이다.
저자들은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매우 유사한 패턴으로 무너졌음을 발견한다. 선거에 의한 독재자의 선출과정, 경쟁자를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인, 언론을 공격하는 지도자..., 이른 바 민주주의의 붕괴 조짐을 알리는 명백한 신호들을 찾아낸 것이다. 특히, 미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4가지 신호를 보라.
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거부(규범 준수에 대한 의지 부족), 정치 경쟁자에 대한 부정, 언론 및 정치 경쟁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경향.... 우리에겐 그저 낯선 징후인가. 국회가 대화·협치를 약속한 지 며칠 만에, 제1야당을 배제한 채 일방독주한다. 그건 대통령의 약속, ‘경험하지 못한 나라’의 한 실천인가? 북한의 위협에 눌려 ‘표현의 자유’를 억누른다. 그럼 대통령이 준수해야 할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는 어디로 갔나?
결국, 우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데자뷔’를 넘어 눈앞에서 보고 있다. 최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보라. 정부는 북한 실력자 김여정의 대북전단 살포비판 담화 이후, ‘대북전단 금지법’을 제정하려 한다. 당연히,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이 뜨겁다. 헌법은 언론·출판 및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그 자유를 규제할 법의 합헌성 판단기준은 예사 까다롭지 않으니.
일단,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면 목적의 정당성과 함께, 수단의 적합성(명확성)-침해의 최소성(과잉금지)-법익의 균형성(비교형량)을 모두 갖춰야 할 터다. ’대북전단 금지법‘, 목적의 정당성부터 문제다. 북한의 위협이 꼭 전단 때문인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해 가며 북한의 요구를 수용해야 하나? 그 요구를 수용하면 북한은 핵(전쟁)을 포기하고 평화를 선택할 것인가?
북한 잇따른 도발 앞에 우린 표현·결사 자유 억압?
이 부분, 정부가 멋대로 판단할 순 없다. 언론자유에 대한 원칙론과 남북관계를 감안한 상황론이 공존하더라도, 국익에의 판단을 정부가 독점할 순 없다. 적어도, 민주주의 규범을 준수한다면 그렇다. 미국에선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도 있다. NYT의 ‘미 국방성문서 보도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이 정부에 요구한 입증책임이다.
‘진보논객’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대북전단 금지법’을 추진을 “반헌법적 발상”이며 “위험한 시도”라고 비판한다. “집권당의 사명을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며, 표현의 자유를 함부로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권력의) 태도가 무섭다”는 것이다(시사IN).
정부가 대북전단을 날려 보낸 탈북민단체를 고발한다, 그 단체들의 설립허가를 취소한다, 남북교류협력법을 활용하여 전달살포를 막는다, 아니, 항공법을 적용한다, 특별법을 검토한다..., 정부의 대응은 좀스럽고 어수선하다. 북한은 ‘큰 그림’ 아래 움직이고, 정부는 ‘북한 기침소리’에 경기(驚氣) 보이는 모양새다. “종이 떼기에 벌벌 떠는 체제라면 그 체제를 반성해야 한다"는 여당의원의 비판(박용진)을 보라. 정부의 ‘선(先)방침결정, 후(後)법률검토’, 이건 민주주의 규범인가?
‘가짜뉴스’ 프레임으로 정보통제... 대통령 비판도 막는 사회
문제는 북한의 비상식적 협박이며 정부의 굴종적 대응일 터다. 북한의 대남공세가 정녕 전단 때문인가? 그리고, 정부가 탈북민단체의 설립허가를 취소한다? 그것도 표현의 자유에, 결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당장 해당 단체들은 반발한다. “5년 전 처음으로 쌀이 담긴 페트병을 북한으로 보낼 때 경찰·군 모두 나와서 봤다, 이제 북한이 뭐라고 하니 제지하는 이곳이 주권국가 맞냐”(박정오)는 항변이다.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이 천부적 인권이 없는 대한민국, 상상이나 해 봤는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과 표현의 자유를 높이 평가하던 국제사회의 비판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런시먼이 말하는 ‘공약성 쿠데타’며 ‘행정권 과용’의 경고 앞에, 우리는 정녕 당당한가?
‘가짜뉴스 규제법’을 제정하고 유튜브를 규제하려는 정부의 집요함도 그렇다. ‘언론의 적극적 통제’ 정책은 이 정부의 특성 중 하나다. 거친 방송장악-언론매체의 정권매체화-전통매체의 공정성 추락 같은 궤(軌)는 그 정책의 산물이다. 그 끈질긴 ‘가짜뉴스‘ 대응입법 추진 역시, 비판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정보 왜곡·통제의 한 양상이다. 정부가 ’가짜뉴스‘를 자의로 재단하고 처벌하겠다는 발상, 참 두렵지 않은가.
최근 ‘진보논객’ 손석춘 교수(건국대)는 정부의 언론통제 실상과 언론개혁운동의 정파성을 작심하고 비판했다. KBS, MBC, 교통방송(TBS) 시사프로그램들은 친정부 편향 세력의 영향권 아래 있으며, 시민언론운동은 민주당의 하위조직으로 편입되고 있다는 인식이다. 우리 시민언론운동이 언론자유를 위한 담론 보단, 권력우선의 헤게모니 투쟁임을 짚었다는 점에서, 참 예리한 판단에, 정곡을 찌른 비판이다.
그 말들 중 뒤끝 있는 지적. “노무현·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고 기자를 ‘기레기’로 단정 짓는 해괴한 흐름을 목도하고 있다”는 것, “권력감시가 저널리즘의 생명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수고를 접은 채 진영 논리와 확증편향이 짙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대통령 '비방'해도 참고, 우리는 '비난'만 해도 억압
진중권과 청와대·민주당 관계인사들의 요즘 설전을 보며 깨우친 사실, 북한은 ‘실세’부터 ‘옥류관 주방장’까지, 우리 대통령을 대놓고 비방·모욕하며 막말을 해도 항의다운 항의도 못하면서, 우린 대통령을 비판만 해도 벌떼처럼 달려들며 억압하려 든다는 것이다. 북한의 ‘삶은 소대가리’, ‘국수 처먹을 땐 요사 떤다“는 괜찮고, 우리의 ’의전 대통령‘은 문제인가?
진중권은 ‘‘대통령을 욕(조롱)하는 것은 시민의 당연한 권리’라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억한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을 비방하는 것조차 ‘주권을 가진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했는데, 문재인 정권은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조차 국민에게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항변이다. 혹, 우리 권력은 북한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는 존중하며, 우리 국민의 기본권은 가벼이 하는 것인가?
그나마 청와대·정부가 대응에 나선 것은 대통령에의 인신공격까지 당한 뒤다. 김여정이 대통령의 연설내용에, 연설방식, ‘스타일’까지 문제 삼으며 ‘말폭탄’을 퍼부은 뒤다. 오직 대북전단 막기에만 신경을 쓰다, 북한이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며 군사적 도발까지 거론한 뒤다. “무례하다”, “기본적 예의를 갖추기 바란다”는 비판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북한의 망동에는 참 일관성 있는 유화정책이다.
북한의 ‘폭파’며 ‘군사행동’이며 ‘막말’에도, 대통령은 “대북전단 못막아 아쉽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여당은 ‘판문점선언 비준’의 당론 채택을 서두른다. 판문점선언을 비준하면 남북관계가 나아질 수 있을까? 국민 절반 이상(51.6%)은 공감하지 않고 있다(‘공감’ 39.2%)(리얼미터). 북한이 대통령을 조롱하든, 남북관계를 파탄 내든, 그에 따른 국민분노가 치솟든, 대통령의 인식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 절제 없는 추구... 한국 민주주의, 이대로 침몰?
그러고 보면, 정부·여당은 국가의 품격이며 국민의 생각이야 어떻든,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다하려 하는 모양이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 대통령 열혈 지지자들의 무조건적 애정 표현대로다(이훈범). 그래서 여·야 협치는 팽개치고, 지지층 결집 우선으로, 북한엔 끝없이 유약하게, 언론에도 정부 간여를 추구하는 모양이다(박보균).
그래서, ‘섬겨야 할 국민’의 기본권을 경시하며, 오직 ‘하고 싶은 것’에 매달리는 모양이다. 최근 남북관계의 급격한 악화상황에 고교 역사교과서엔 ‘남북긴장 대전환’이라는 화해업적이 실려 있다는건 또 뭔가? 특히 대통령은 정치에 뛰어들기 전 ‘인권변호사’의 명망에도, ‘천부적 인권’, 그 언론·출판의 자유며 집회·결사의 자유까지 경시하는 것을 보면, 그 ‘하고 싶은 것’의 끝은 어디일지, 참 두렵기도 하다.
결국, 그 ‘하고 싶은 것’의 절제 없는 추구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신호이다. 그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민주주의 규범을 외면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경향, 그것은 런시먼이 말하는 ‘공약성 쿠데타’이며, ‘행정권 과용’과 상통한다. 대한민국의 국격이며, 대통령의 본분을 가벼이 여기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대통령이 계속 지금의 기조를 유지하든, 국민과 소통하며 민주정치를 복원하든, 그건 그의 온전한 선택이다.
그 속에서 우리가 확인할 바는 뚜렷하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 민주주의의 위기징후가 있다면, 그만은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미래는 국민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 런시먼이 사숙(私淑)했던 ‘행동하는 자유인’ 조지 오웰의 유언과 같은 경고도 그렇다. “(감시·통제의 디스토피아) 그런 일이 벌어지게 놔두지 말라. 그건 당신에게 달렸다”(<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
오늘도 남북갈등은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럴수록, 정부는 관련 정보를 독점하며 오직 ‘정부의 의지’로 대응하려는, 그 인식을 버렸으면 좋겠다. 지금 남북관계, 그 인식이 다앙햔 사안일수록 공론을 형성해가며, ‘국민의 의지’로 함께 대응해 갔으면 참 좋겠다. 그게 민주주의의 규범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한국의 민주주의, 과연 그 위기신호들을 가벼이 하다 끝내 이대로 무너질 것인가? 국민들의 자각 아래 이 위기를 극복하며 민주주의를 새삼 꽃피울 것인가? 우리 ‘권력 가진 사람들’의 행보를 지켜보며, 정말 두렵기만 한 이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