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이 존망의 위기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한국 언론은 언론환경의 격변에 따른 산업적․구조적 위기에 직면한 지 오래다. 최근 권력의 집요한 언론자유 억압 공세에 직면, 겪어보지 못한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권력이 언론자유 억압에 정치적 승부수를 던져도, 언론은 무기력하다. 그 절체절명의 위기, 뿌리는 언론의 신뢰 상실이다.
언론의 신뢰 상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자업자득의 결과다. 기자들이 저널리즘의 기본을 잃고 진영논리·왜곡보도에 탐닉하며 저널리즘의 붕괴를 재촉한다. 직업윤리를 망각하며 언론의 품격을 잃는 일탈에 빠져든다. 기자 스스로 언론의 존립바탕을 허물며 사회적 비판을 받고 있다. 그 스산한 언론 현장에서, 기자는 무슨 소용이랴?
기자들이, 언론의 존립바탕이라 할 진실·공정을 추구하지 못한다? 민주국가의 존립을 위한 권력감시·여론형성에 제 몫을 다하지 못한다? 국민 통합에 기여하기는커녕 내전적 분열을 부추긴다? 그래서, 언론은 국민의 신뢰를 잃고, 권력은 그 무기력한 언론을 옥죈다? 그런 언론, 또 무슨 소용이랴? 한국 언론, 기자의 기자정신․직업윤리부터 회복하며, 언론의 신뢰를 찾아가야 한다.
1. 기자는 누구인가? 미국 ‘언론인의 신조’는 선언한다, “나는 믿는다, 언론인은 한 전문직이라고-”. 기자는 그만큼 뚜렷한 직업적 특성을 갖고 있다. 권력 비판·감시의 사명, 공중에의 봉사에 대한 신념, 진실의 가치를 추구할 독특한 윤리·역량이다. 그 특유의 행동방식, 언론윤리의 우산 아래 공유하는 원칙들은 명료하다.
언론의 2대 전통적 과제, 정확성․공정성이다. 기자들이 추구하는 목표, ‘진실’이다. 명저 '저널리즘의 기본요소'는 취재현장의 논리로, 기본요소 9가지를 말한다. 저널리즘의 첫째 의무는 진실추구다, 저널리즘은 시민에게 충실해야 한다, 저널리즘의 본질은 검증의 규율에 있다․․․.
결국, ‘진실’의 키는 검증의 규율에 있다. BC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수스 전쟁' 서문에서 ‘기사 작성법’ 같은 룰을 제시했다. “나는 나의 일방적 인상에 이끌려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내가 묘사한 사건이나 목격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철저히 점검하며 사건의 현장에도 직접 가 보았다․․․.” 이 검증의 규율, 저널리즘과 오락․선전․ 픽션과의 차이다.
한국 언론사에도 검증의 규율은 찬란하다. ‘한국 최초의 현장탐사 기사’ 김동성의 “나는 민영환의 혈죽(血竹)을 직접 보았다"를 보라. 그는 미국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소년 시절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읽고 언론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기자의 천성을 타고났던가. 16세 때인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자결한 민영환의 집에 ‘붉은 대나무가 피어났다’는 소문을 듣곤, 이를 확인하려 개성에서 서울까지 찾아갔다. 현장 검증 끝에, ‘민영환 자택 혈죽 탐방기’를 썼다. 그 치열한 현장정신과 생생한 묘사 속에서 김동성의 기자정신과 필력에 경탄한다.
한국 언론에선 올곧은 기자정신과 검증에 투철한 언론인이 즐비하다. 자서 '체험적 사회부 기자론-네가 기자냐'를 남긴 동아일보 이연교의 전설적 스토리를 보라. 그는 기자 시절 불의의 교통사고로 청력과 평형감각을 상실했다. 현업 복귀의 꿈을 안고 8년을 투병하다 끝내 ‘허망한 꿈’을 절감하고 사직했다. 그의 집념과 한(恨)을 보는 박권상․오상원․김중배의 한탄을 읽을 때면, 나는, 늘 눈물이 난다.
책 제목, 왜 ‘네가 기자냐’인가. 그는 국방부 출입 시절 선배로부터 눈물이 나도록 격한 호통을 당한 일이 있다. “네가 기자냐?”고-. 장관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충격적 사건이 터졌을 때, 회견 자리에서 “장관은 책임을 지고 물러날 용의가 있는가?”를 묻지 못했다는 이유다. 그는 선배의 호통을 날로 가슴에 새기며, 그가 약해질 때마다 자신을 때리는 채찍으로 삼았다.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 한국일보 안병찬의 ‘사이공 패망 최후 3일’을 읽었는가. 베트남전쟁의 끝 사이공 패망 때, 한국 언론으론 유일하게 현장을 기록한 르포기사다. 그는 월맹군이 최후의 진격을 해올 때 현장을 사수했다. 그는 회고한다. 사이공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갔을 때 계속 철수 지시를 받았다, 나도 인간적으로 겁이 났다, 그러나 눈앞의 현장을 남겨두고 그냥 떠날 수가 없었다고.
그 ‘훌륭한 선배’들은 언론인의 사명과 신념, 독특한 윤리와 역량으로, 맡은 바 역할에 충실했다. 만일 그것이 없었더라면, 역사의 이면에 묻혔을 숱한 사실을 발굴하며 역사를 기록했다. 기자세계의 그 격렬한 특종경쟁에서도 늘, ‘진실보도’의 원칙에 투철했다. 그 언론의 역정은 국민의 신뢰를 굳건히 다져온 바탕이다.
2. 한국 언론의 본질적 위기는 정파성과 진영논리다. 언론은 더러 강고한 진영논리에 탐닉하며, 저널리즘의 사멸을 부추기고 있다. 권력의 폭주와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권력을 감시하며 시민에게 충실할 그 기본을 팽개치고 있다. 그 결과는 언론의 신뢰 상실이다.
언론의 전통적 과제, 그 ‘진실 추구’에도 허술하다. 저널리즘의 첫째 의무는 진실추구, 그 본질은 ‘검증의 규율’에 있다는 것 아닌가. ‘훌륭한 선배’들은 사명과 신념, 윤리와 역량으로, 제 몫에 충실했다는 것 아닌가.
그러나, 오늘의 기자들은 더러, 기자의 사명․신념과 윤리․역량에 취약하다. 기자의 독자취재로 권력의 부정, 사회의 부패를 폭로하는 보도기법, 탐사보도에의 도전에 게으르다. 기자가 ‘검증의 규율’ 대신, 투키디데스가 금기시한 방식, ‘일방적 인상에 이끌려 쓰는’ 수준에 머무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가.
최근 한겨레의 “윤석열, 삼부토건서 골프접대·향응·선물 받은 정황” 기사를 읽는다. 윤석열이 10년 전쯤 삼부토건 전 회장한테서 수차례 골프 접대와 향응을 받았다고 의심할 만한 기록이 확인됐다는 것, 그 근거는 비서실의 달력 일정표라는 것이다. 그 일정표를 근거로, “골프 회동을 한 것으로 돼 있다”고, “함께 저녁 약속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윤석열은 이 보도에 “접대를 받은 사실 없다”고 반발했다. 이 반박에 대한 기자의 반응, ‘골프․향응 없었다면 구체적 해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 “가능성 높다고 본다”고 주장하며, 상대방에게 반증을 요구한다? 사건기자의 느낌으로, 썩 달갑지 못하다. 그 가능성 증명은 기자의 몫, 탐사보도의 영역이지 않을까?
취재과정에서 언론윤리를 외면하는 일탈은 또 어떤가. MBC의 최근 ‘경찰사칭’ 취재며 연전 ‘몰래촬영’ 취재가 그렇다. MBC는 채널A ‘검언유착’ 의혹의 취재윤리 위반을 보도하곤, 법적․윤리적 문제가 더 많은 불법취재를 강행했다. '경찰 사칭'이든, '몰래 촬영'이든, 그건 언론의 극단적 타락 형태다.
최근 탐사보도를 내세운 은폐적 취재가 성행한다. 언론의 취재권과 개인의 권리가 충돌하는 영역이다. 언론윤리 영역에선, 기만적 취재를 엄격하게 제한한다. 이번 위장·몰카 취재 역시 한국기자협회 언론윤리 실천요강(신분사칭·위장 금지, 도청·비밀촬영 금지)을 위반했다. ‘공영방송’이 취재윤리에 이처럼 소홀할 때, 다른 형태의 매체들은 또 어떻겠나.
윤석열 부인 검증과정에서 불거진 유튜브 채널 ‘열린공감TV’의 취재윤리 위반과 정파성 논란을 보라. 취재팀은 관련 A 변호사 모친 집을 방문하며, 신분을 속이고 허위 진술을 유도헸다는 논란이다. 취재방식의 적절성․윤리성, ’지나치다‘(KSOI). 취재팀 중 한 기자가 경향신문 명함을 활용한 부분도 문제다. 우리 언론의 신뢰를 갉아먹는 타락행태다.
3. 언론의 문제상황에서, 언론인 출신 정치인의 분별없는 발언도 언론의 신뢰 추락을 부추기고 있다. 김의겸의 ‘경찰사칭’ 옹호, ‘신분 위장’ 두둔, 이낙연의 부적절한 ‘언론 까기’가 그런 류다. 두 의원은 최근 사회 각계와 언론단체도 반대하는 ‘언론징벌법’ 제정에 앞장서거나 찬성하고 있고.
[차용범 칼럼]'자릿값'도 못해서 '쪽팔리는' 사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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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겸의 MBC 옹호 발언은 언론윤리에 무지하거나 진영논리에 침몰한 궤변이다. “기자가 수사권이 없으니 경찰을 사칭한 듯”, 기자사회를 모욕하며 언론의 신뢰성을 떨어뜨릴 망발이다. “제 나이 또래 에선 한두 번 안 해본 사람이 없을 것”? 그는 기자 생활을, 언론인의 독특한 윤리와 역량보단, 그저 그런 방식으로, 살아온 것 같다.
그는 ‘신분 위장’ 취재를 한 '열린공감TV'도 적극 두둔했다. "기자들이 취재하며 처음부터 '내가 기자다'라고 명함을 내미는 경우는 없다"는 주장이다. 그는 그 천박한 인식으로 27년여 취재현장을 지켰다는 것이니, 그에게는 아예 언론윤리 의식도 없었던가? 그는 ‘기자 출신’으로, 얼마나 떳떳한가?
‘김의겸의 감수성’(정환봉), 한겨레 한 데스크의 글은 절절했다. “적어도 내가 지난 10년 동안 한겨레에서 함께 일했던 기자들은 그의 말과 달랐다. 후배 기자들은 경찰을 사칭하는 빠르고 쉬운 방법 대신 밤 서리 맞으며 쓴 긴 편지로 누군가를 설득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한겨레의 건강성에 그나마, 깊이 안도했다.
그렇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경찰사칭․신분위장으로 사회부 기자를 살진 않았다. ‘적’을 마주 보며 불안하고 고달픈 나날을 살면서, 당당했다. ‘사건기자=편집국의 꽃’이던 시절, 그 묵중한 기대 속에 어떻게 그런 타락에 눈 돌릴 수 있나. 굳이 투사․영웅은 아니었어도, 숱한 사건 현장을 뛰며, 시대의 흐름을 가슴에 담고 기자의 몫을 다하려 신명을 다했다. 그 기자의 본성만으로, 역사에 기여할 특종들을 기록했다.
한국 언론의 위기는 절박하다. 무엇보다 권력이 집착하는 그 ‘언론개혁’의 불온한 의도가 영 불안하다. 권력은 ‘언론개혁’의 미명 아래, 대선을 앞둔 ‘언론 옥죄기’에 목을 걸고 있다. 언론에 징벌적 배상을 요구하며, 그 입증책임을 언론에 지운다? 뉴스 포털의 독립적 책임을 물으며 ‘뉴스 암흑화’ 현상을 자초한다? 그들이 그토록 욕하는 박정희도 ‘하고 싶었지만 못한 언론 억압적 규제’다(이준웅).
한국 언론의 위기를 넘어, 민주주의의 붕괴를 걱정할 조짐이다. NYT의 칼럼 모음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경고처럼, 언론을 공격하는 지도자, 특히 언론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경향은 우리 눈앞의 현실이다. 한국 언론은 이미 권력 감시․비판에 무력하다. 무엇보다 언론에의 신뢰가 극히 취약한 현실이므로. 이제 한국 언론에는 숙명적 자문(自問)이 남아 있다. 언론의 신뢰, 누가 찾아 나갈 것인가?
역시 기자다. 기자부터 저널리즘의 경계를 깨우쳐야 한다. 권력 비판·감시의 사명과 진실의 가치를 추구할, 그 본성을 기억해야 한다. 권력이 아무리 재갈을 물려도 결국 쓸 것은 쓰는 기자적 DNA를 되살려야 한다. ‘울산시장 선거 청와대 하명수사 의혹’사건에서, 동아일보는 공소장 전문을 따로 입수, 보도하며 권력과의 갈등에 정면 대응했다. 이 보도에서 미국의 ‘워터게이트 보도’를 연상하는 건, 나뿐인가.
[차용범 칼럼]권력은 진실 앞에 결코 강할 수 없고, 언론은 진실 앞에 결코 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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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에는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르 몽드, 혹은 BBC처럼 국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신문․방송이 없다고들 한다. 해리슨 솔즈베리며 제임스 레스턴, 벤 브래들리 같은 ‘대기자’가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한국 언론사에 ‘위대한 언론인’으로 추앙할 기자는 많다. 제 몫에 충실한 언론인과 저명 언론사는 적지 않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오늘의 기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자중자애해야 한다. 한국 사회를 추동해온 한국 언론의 면면한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유례없는 언론악법 앞에 굳이 ‘시일야방성대곡’의 기개를 보여 달라는 게 아니다. 기자부터 제 몫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하늘의 무게만큼 자라났고 또 자라나고 있는 국민에게 의지하라는 것이다.
기자, 오늘의 위기 앞에서 정말, 속절없이 무너질 것인가? 기자, ‘기자’로 살면 한국 언론을 되살리며 ‘기자’로 남을 것이다. ‘기레기’로 살면 한국 언론의 사멸을 재촉하며 ‘기레기’로 남을 것이다. 기자, 정녕 그 선택은 무엇인가?